
필수 | 서울 동작구 현충로 102, 1층 tel. 010-3244-8338



필수는 30년 된 이발소였다. 흑석동에서 나고 자란 임아란 사장은 이 골목을 걸어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다. 오랫동안 영업하던 이발소가 문을 닫자, 그녀는 이곳에 술집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2017년 12월에 필수는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원래는 2층 건물로 아래층은 이발소를 운영하고 위층은 가정집으로 사용했다. 머리를 자르고 깔끔하게 단장한 손님들의 행복한 표정과 가족들의 대소사가 공존했던 공간이 이제는 맛있는 음식 냄새와 황
홀한 술 향기로 채워진다.
임아란 사장은 건물이 오래되고 좁은 것을 최대한 장점으로 살려보기로 했다. 2층은 허물고 층고를 높여 답답한 느낌을 없앴다. 프라이빗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그녀는 창문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간판도 없이 조용하고 감성적인 필수가 탄생한 계기다. 가게는 다가오는 4월이면 결혼할 예비 신랑과 함께 꾸려나간다.
가게 내부는 외관을 보면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다. 여덟 개의 테이블이 홀을 채우고 가장 안쪽에는 주방이 자리 잡았다. 각종 그림과 석고상, 인도풍 조형물에서부터 아기자기한 전구까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소품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벽면 곳곳에는 마카를 사용해 그린 그림이나 글귀가 하나의 작품처럼 인상적으로 보인다. 예비 부부가 그림을 취미로 하는 까닭이다.
이곳의 포인트는 오래되어 볼품없는 벽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지저분한 느낌을 그대로 둬 인테리어 콘셉트를 잡았다. 깔끔한 것에서 주는 긴장감과 단조로움을 완벽하게 배제하고, 이것저것 다양한 소품을 채워가며 복잡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때론 이렇게 정돈되지 않은 공간이 따뜻하고 포근함을 줄 때가 있다. 완벽한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는 사람에게 무작정 끌림을 느낄 때가 있듯이 말이다.
똑같은 일상 속에 특별함 찾기
오늘 하루 고생했다는 단 한마디의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우린 누군가를 떠올린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좋은 사람, 그리고 한 잔의 술로 고된 일상을 툭툭 털어버리기도 한다. 자금운용부 구태영 과장은 필수의 가장 큰 장점을 ‘안락함’이라고 말한다. 시끄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따뜻한 엄마 품 같은 곳. 중앙대를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이곳을 찾는 이유는 젊은 날의 향수가 고스란히 남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흑석동은 대학 시절 돈이 없어도 술 한잔 하고 싶은 젊음을 허락해 준 곳이기도 하다.
“필수에 올 때마다 빈티지한 가게 분위기 때문에 홍콩 란콰이퐁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져요.”
오늘 만나기로 한 박민우 대리(반월지점)는 대학교 동문 6년 후배.
박민우 대리가 신입사원 때부터 잘 따라서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지내는 술친구 사이다. 구태영 과장은 아지트 같은 공간인 필수를 후배에게도 소개해주고 싶었단다. 박민우 대리를 기다리는 사이, 익숙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변한 건 없니, 날 웃게 했던 예전 그 말투도 여전히 그대로니.’ 토이의 4집 앨범에 수록된 <여전히 아름다운지>의 노랫말. 떠난 연인을 잊지 못한 한 남자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녹아져 있는 곡이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90년대 감
성에 가게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른다.
“고등학교 때 토이를 너무 좋아했어요. <여전히 아름다운지>, <거짓말 같은 시간>, <스케치북>… 4집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다 좋아서 앨범까지 구매했어요. 필수에서는 이런 오래된 음악을 틀어줘요.”
필수에 마련된 안주류는 다른 곳에서 쉽게 맛볼 수 없는 퓨전 한식이다. 한 가지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안주를 개발한 까닭에 이름만 들어도 궁금해지는 메뉴가 한가득이다. 이 중 구태영 과장이 손꼽을 만큼 좋아하는 메뉴는 매운 삼겹 크림 파스타. 필수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기도 한 매운 삼겹 크림 파스타는 모든 주종이 잘 어울리지만, 구태영 과장은 주로 와인과 먹는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맛있는 냄새와 따뜻한 온기, 그리고 잠깐 마음을 녹일 아늑한 공간까지, 채우고 싶은데 비우라고만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감성술집 필수는 우리곁에 영원한 아지트로 남을 것 같다.
Words 김효정 Photographs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