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렬한 전언이 담긴 작품일수록 그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마치 화두를 붙잡고 참선하듯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좇으며 사유를 이어간다면 소설을 읽든 영화를 보든 그것은 최상의 독법이라 할 만하다.
난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미국 작가 대니얼 월러스의 소설 ‘빅 피쉬’(Big Fish, 장영희 옮김, 동아시아 펴냄)를 토대로 한 팀 버튼 감독의 동명 영화만 해도 그렇다. 영화 ‘빅 피쉬’는 소통을 통한 세상과의 화해라는 메시지가 다른 모든 영화적 요소를 압도한다.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이완 맥그리거·앨버트 피니)은 세일즈맨이다. 허풍선이 기질이 다분한 그는 더 큰 세상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반인반수 같은 거인, 서커스 단장인 늑대인간, 샴쌍둥이 자매, 괴짜시인 등 다양한 인간군상과 어울리며 영웅적인 모함과 로맨스를 경험한다. 하지만 지금은 죽음의 침상에 누운 초라한 노인일 뿐이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들 윌 블룸(빌리크루덥)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진실을 알기 위해 내면의 대화를나누려 하지만 아버지는 어디부터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모를 황당한 모험담만 늘어놓는다. 아버지란 본래 진지한 대화에는 익숙하지 않은 존재인가.
비밀의 문은 아버지가 쇠락한 정신을 추스르며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기면서 열린다.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믿을 수 있겠니?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큰 연못에서 노는 큰 물고기. 그것이 바로 내가 원했던 거란다.” 이어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람을 진정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위대하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아들은 밖으로만 나돈 아버지이지만 그에게 오롯이 ‘위대함의 월계관’을 씌워 준다. 에드워드는 ‘큰 연못의 큰 물고기’가 되기 위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지만 결국 지금 여기, 가정이라는 이름의 소우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행복’을 되찾았다.

아버지, 그리고 자식으로 산다는 것
세상의 많은 아버지들은 또 다른 ‘에드워드’다. 거북처럼 딱딱한 등껍질 속에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살아간다. 아버지는 수줍음이다. 한때는 소년으로 또 청년으로 무청처럼 푸르렀던 아버지, 그러나 지금은 그 푸른 꿈의 잔해를 부여안고 홀로 쓸쓸해 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외로움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짐짓 의연한 척 언제나 미소 짓는다. 세상에 아버지라는 직업보다 더 가슴 벅차고 고달픈 것이 있을까.
에드워드는 평생을 ‘판타지의 감옥’에 갇혀 허랑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 동화 같은 삶에 거짓은 없다. 애쉴랜드 출신 촌뜨기가 온갖 일터를 전전하다 마침내 성공해 수상과 함께 식사를 한 것에 감탄하는 대목에서는 묘한 페이소스마저 묻어난다.
‘머리’만으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 같은 에드워드와 윌은 ‘가슴’으로 하나가 됐다. 작품에 몰입해 주인공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윌이 되고 에드워드가 되어 오늘날 잃어버린 구원의 아버지, 영원의 아들을 찾아보자.
윌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빅 피쉬>는 부성이 사라져가는 시대, 아니 부성을 거부하는 ‘아버지 부재’의 시대, 아버지의 존재를 신화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아버지로서 그리고 자식으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한 아버지의 자격(Fatherhood)과 자식의 신분(Sonship)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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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김종면(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전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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