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민족지도자 도산 안창호
위대한 민족지도자 도산 안창호
  • 도움뉴스 기자
  • 승인 2019.07.13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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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준문 조각가/수필가
사진 장준문 소설가
사진 장준문 소설가

 

지난해 어느 가을날 오후 뿌리공원 수변무대에서 대전흥사단 회원들이 공연한 연극제목(김용복 작, 김기출 연출)이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라고 한 도산 안창호선생의 어록을 변용한 말인 듯하다. 극본작가분의 초대로 객석에서 가을햇살을 받으며 공연을 관람했다. 출연진 대다수가 6, 70대의 아마추어들이라 연극 자체로선 어설펐지만 진지함만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았다. 흥사단 설립자로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도자인 안창호 선생의 스토리인 만큼 당연했겠다. 좀 오래 된 일이라 기억나는 건 길거리에서 사소한 일로 다투는(민족내부갈등 상징인 듯) 청년들을 타이르는 모습과, 끝부분 이등박문과의 논쟁 장면뿐이다.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은 평남 강서 출생으로 어릴 적부터 남다른 영특함으로 일찍이 민족정신에 대해 깨쳤다. 1894년 상경하여 언더우드(Underwood, H. G.)의 구세학당에서 수학하면서 서구문물과 기독교정신을 습득했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그의 삶은 온전히 민족계몽과 독립운동에 바쳐졌다. 갓 스물에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이듬해 서재필, 이승만 등 청년들과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민권운동을 주도했다. 1902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하고 교포들의 계몽활동에도 힘썼다. 1907년 돌아와 그의 발의로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 등과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이 무렵 통감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언감생심 ‘도산내각’을 미끼로 일본의 대 조선정책에의 지지를 회유했으나 단칼에 거부했다. 극의 끝부분 이등박문과의 논쟁장면이 이 내용인 듯하다.

  국권상실 후 선생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서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하고, 3.1운동 직후에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가들 가운데서도 주도적 활동을 했다.

 

  당시 항일운동은 무력투쟁, 외교전 등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졌으나 도산의 방법은 ‘민족개조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라고 인격혁신을 주창했다. 인격혁신의 덕목은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의 4대 정신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무실’과 ‘역행’을 강조했다. ‘무실’은 참되기에 힘쓰라는 인격개조의 의미이며 ‘역행’이란 힘써 행하라는 실행의 의미이다. 또한 이는 ‘주인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그것은 대성학교의 교훈으로 나타나 있듯 ‘주체’, ‘독립’, ‘책임의식’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기개조와 민족개조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교육사상은 점진학교, 대성학교, 난징의 동명학원 등의 설립으로 실현되고 흥사단운동을 통해서 심화되었다.

 주목할 점은 도산사상은 이미 ‘민주’를 지향했다는 사실이다. 어느 해 상해임시정부 신년하례회에서 “옛날에는 황제가 1인이었지만 오늘날에는 황제가 없나요? 있소! 조선의 국민 모두가 황제요.” 라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의 천명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 연루로 일경에 체포되어 4년의 실형 후 석방되었다. 1937년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다시 체포되어 수감 중 병으로 풀려났으나 염원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38년 3월 간경화증으로 타계하시고 말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충신 장세동이 있었다면 도산 선생에겐 충실한 조력자 유상규(劉相奎, 1897~1936)가 있었다. 그는 경성의전(서울대 의대전신) 학생으로 3.1운동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재학 중 상해로 건너가 흥사단에 가입하고 임정 내무총장 안창호의 비서가 되어 그를 어버이처럼 모시며 함께했다. 우리민족엔 인재가 필요하니 돌아가 학업을 마치라는 선생의 권유로 1924년 귀국해서 복학했다. 그러나 졸업 후 경성의전 강사로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과로로 순직하고 말았다. 그는 망우리 가족묘지에 묻혔는데 도산선생은 자신의 사후 유상규 군의 묘소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분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생은 사후 유언대로 유상규 의사의 묘소 위에 묻혔다가 1973년 강남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는데 유지를 헤아려 묘비만은 원래의 망우리 유상규 의사 곁으로 다시 이전했다고 한다. 위대한 민족지도자의 숭고한 모습이다.

  현재의 정치인들이 가장 모범으로 생각하는 분으로 안창호 선생을 꼽는다고 한다. 가정(假定)이란 무의미하지만 만일 선생께서 그처럼 일찍 서거하시지 않았다면 분명 광복 후 무질서한 해방공간에서 큰 역할을 하셨을 것이고, 대한민국의 현대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