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에 단 한번
생애에 단 한번
  • 도움뉴스 기자
  • 승인 2019.08.2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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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金鎔泰(대전광역시노인복지관 자원봉사자)
사진 김용태 자원봉사자
사진 김용태 자원봉사자

 

초등학교시절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였다.

가사일로 바쁘셨던 엄마로부터 애정의 결핍을 겪은 후유증이었나 싶다. 구슬치기, 자치기, 딱지치기, 탄피치기, 제기차기, 방패연 날리기를 하면서 동네 아이들끼리 만나면 해가는 줄도 모르고 노는 재미에 정신이 팔리곤 했었다. 여자애들은 줄넘기와 선을 긋고 폴짝폴짝 뛰는 놀이를 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의 세대는 굴렁쇠만 있어도 좋고 철사 줄로 스케이트를 만들어 놀던 시절이었다. 얼음을 지치다 물에 빠지면 불을 지펴 바지를 말리다가 태워먹는 경우도 가끔씩 있었다.

몇 살 때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실컷 놀다가 어둠이 내린 뒤에야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저녁을 먹은 후라는 걸 확인하기도 무섭게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고 조여드는 걸 감당하기가 어려웠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화난 목소리로 어디서 무얼 하다 이제 왔느냐고 불호령을 내면서 회초리를 찾고 있었다. 처음 당하는 아버지의 화난 모습을 감당하기가 죽기만큼 어려워서 나는 최후의 수단이라 생각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을 뛰쳐나왔다. 막상 나오고 보니 갈 곳이 없었다. 정처 없이 캄캄한 논두렁 밭두렁을 헤매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도 곧장 들어가서는 안 되겠다 싶어 좀 더 지체하다가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눈치를 보며 귀가했다. 더 이상은 야단을 맞지 않아도 내가 잘못한 만큼은 응분의 벌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셈본 책을 가져오라고 하시더니 문제를 풀어보라고 하셨다. 문제를 풀려니까 글씨는 안보이고 졸음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 꾸벅꾸벅 졸았다. 어이가 없으셨던지 그만 자라고 해서 한숨을 돌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이후로는 야단맞을 일은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나는 어린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집안에서 애들 교육하듯 벌을 준다 해도 폭력이나 과중한 짐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 그날의 무게감을 연상하고 가능하면 말로 타이르는 자율적인 지도방법을 이용하게 된 것이다.

(2019.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