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일까, 배반일까! 여자의 일생
사랑일까, 배반일까! 여자의 일생
  • 도움뉴스 기자
  • 승인 2019.11.05 15: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위고의 <레미제라블> 이후 가장 뛰어난 프랑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극찬하면서 한 말이다. 그러나 그 소설은 시대를 뛰어넘지 못하고 갇히고 말았다. <여자의 일생>은 명징한 문체, 간결하고 섬세한 묘사, 흥미로운 소재, 긴장감 높은 극적 구성을 가진 뛰어난 사실주의 문학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평론가의 불만처럼 “그의 스승인 플로베르나 도데처럼 인물을 자신의 내부에 살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사랑
<여자의 일생>의 주제이자, 작가의 메시지이기도 한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것인가 봐요”란 마지막 구절을 말하는 사람은 정작 소설 전체의 삶을 관통해온 주인공 잔느가 아닌 하녀 로잘리였다. 작가의 이 같은 시선과 마음, 표현은 독자들에게까지 알게 모르게 전달된다. 그래서 <여자의 일생>은 뛰어난 소설적 완성도, 인물에 가진 연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감상에 그치고 만다. 시대를 뛰어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보편성조차 얻지 못했다는 비판을 듣는 이유다.

소설을 관통하는 정서는 불행한 삶이 가져온 아픔과 슬픔이다. 여주인공 잔느에게 그 불행과 슬픔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랑이며, 부모를 제외한 그녀의 주변 인물들 모두 사랑을 배신한다. 남편 줄리앙, 아들 폴, 하녀 로잘리, 그리고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질베르트 백작 부인까지. 결혼 전에 이미 하녀 로잘리를 임신시키고, 백작 부인과 외도로 자신을 배신한 남편, 그 배신으로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 모든 희망과 애정을 쏟았지만 창녀와 놀아나면서 재산을 탕진하는 아들에게 상처를 받으며 27년간 살아온 여자에게 ‘사랑’은 ‘삶’이면서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환상’이다.

여자의 일생



그럼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잔느
모파상은 “삶에 유일하게 좋은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이라고 했지만, 그 때문에 상처투성이가 되는 여자의 일생으로 사랑을 비관하고 있다. 잔느의 사랑은 순수하고 고결하지만, 한편으로 무지하고 몽환적이다. 또한 주체적이지 못하고 종속적이면서 회귀적이다. 스스로 사랑의 환상에 빠졌고, 그 사랑의 배신과 사악한 운명에 절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깨달은 것은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과 잠시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끝없는 추억과 아들에 대한 오히려 집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둘 역시 자신을 허망하고, 불행의 나락으로 빠뜨리고 말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런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어린 손녀를 안고 무한한 감동으로 미친 듯이 입을 맞춘다.

영화 <여자의 일생>에서 그녀는 이렇게 독백한다. “열매가 맺지 않으면, 꽃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의 꽃과 열매는 무엇일까. 프랑스 차세대 거장으로 꼽히는 스테판 브리제 감독은 소설의 작가 전지적 시점과 달리 모든 것을 잔느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선형적 구조를 지닌 원작과 달리 잔느의 회상을 활용해 시간을 유기적으로 배치했다. 인간은 소설처럼 선형적으로만 살지 않는다.

영화는 모파상이 소설에서 차가우리만치 날카롭고 명징한 언어로 묘사한 사랑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비참한 현실과 아름다운 추억을 빛과 어둠의 대비로 표현했다. 잔느도 “슬프고 우중충하고 모든 것이 어두울 때 구름사이로 비치는 한줄기 햇살이 신의 미소이며 희망”이라고 했다.


소설을 배반한 영화,
소설과 영화의 아득한 거리
원작에 대한 배반, 문학적 구성 깨트리기. 이런 변주야말로 영화가 소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사실주의와 선형적 내러티브를 상징과 영상 이미지의 교차로 대신할 수 있다. 열 두살 된 아들 폴의 반항과 남편의 용서 빌기, 하녀 로잘리와의 수프 이야기처럼 훨씬 강렬한 대사와 행동으로 영화를 꿈틀거리게 한다.

“<여자의 일생>에 관한 한 원작을 배반하는 것이 원작에 충실한 방식, 문학적인 측면을 부수어 영화적인 이야기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란 감독의 얘기는 어느 정도 맞다. 소설을 배반해야만 영화가 될 수 있고, 배반함으로써 오히려 소설에 충실할 수 있다는 이 이율배반에서 소설과 영화의 아득한 거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운명’을 예감한다. 잔느의 사랑과 상처처럼.

소설 <여자의 일생>이 이전에 한 번도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비록 모파상의 주옥같은 단편들에는 못 미친다고는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자 고전으로 꼽히는 장편이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아무리 세련된 계산과 품격 있는 현대적 예술적 감각, 이미지와 상징을 동원해도 그것으로 소설이 가진 시대의 벽을 넘을 수 없으며 과거가 현재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무슨 옷을 입었건, 어떻게 말하든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 가치와 이상이 담겨 있다. <여자의 일생>에서 그것은 무엇일까. 여자의 수동적이고 운명적인 삶일까. 아니면 그녀가 일생 동안 매달린 사랑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투쟁과 희생일까. 19세기의 소설도, 134년 후에 만든 2016년의 영화도 자신 있게 “이것”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Words 김혜원 피엠픽처스 대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