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의 심장을 강타한 쾌걸 이봉창
제국주의의 심장을 강타한 쾌걸 이봉창
  • 도움뉴스 기자
  • 승인 2019.11.11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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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준문 조각가/수필가
사진 장준문 조가가/수필가
사진 장준문 조각가/수필가

 

몇 달 전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이봉창(李奉昌, 1901~1932) 의거를 다루었는데 한 전문가가 뜻밖의 말을 했다. 위대한 항일투사 이봉창 의사.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고 신 일본인으로 천황의 신민이 되고자 안달했던 건달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위대한 독립투사가 되었을까?

 

1931년 정초,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 하오리(일본식 남자옷)에 게다(일본식 나무신)선생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백범은 그를 면밀히 관찰하고 면담한 결과 그가 단순한 건달이 아님을 간파했다. 확인결과 그는 한국태생 일본인 양부(養父)를 두고 일본인행세를 하는 기노시타 쇼죠(木下昌藏)라고 하는 청년 이봉창이었다.

이봉창은 1901년 서울출생으로 어려서 일본인 제과점과, 그 후 만주 남만철도회사 운전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조센징’이라며 심한 차별과 학대를

 

경험한다. 1925년 도일하여 대판(大阪)의 철공소에서 일하던 때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이름도 기노시타로 바꾸었다. 그 후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지를 전전하며 날품팔이 등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6년여 일본생활에서도 차별은 여전해 모두가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 후 큰 뜻을 품고 독립운동 본거지인 상하이로 건너갔던 것이다.

 

이봉창은 백범과의 면담과정에서 백범의 독립의지와 애국심에 크게 감명을 받고 일제에 타격을 가할 어마어마한 계획을 제안한다. “제 나이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들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그의 성업이란 히로히토 일왕 저격이었다. 백범으로서도 침체된 독립운동을 되살릴 방안은 의열투쟁 뿐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거사 준비엔 1년이 걸렸다. 백범이 자금과 수류탄을 준비하는 동안 이봉창은 일인 인쇄소에 취직해서 봉급을 타면 여전히 술로 호사를 즐겼다.

1931년 12월. 준비를 마친 백범은 이봉창에게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집에서 태극기 앞에 선서를 하게 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선서 후 기념촬영을 하며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범에게 오히려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기쁜 낯으로 찍읍시다." 라고 했다한다.

 

이봉창은 일인으로 가장하고 12월 17일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2년 1월 8일 일왕이 도쿄 요요기 연병장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백범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 라는 암호전보를 보냈다. 드디어 1월 8일. 의사는 관병식 후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소란 중 경찰이 엉뚱한 사람을 체포하자 의사는 “나야 나!” 라고 외쳤다고 한다. 7월 19일 대심원 공판에서 “나는 너희 임금을 상대로 하는 사람이거늘 어찌 너희들이 감히 내게 무례히 하느냐.” 라며 재판을 거부했다. 역시 쾌걸 다운 모습이다. 대심원은 궐석으로 사형을 선고했고 1932년 10월 10일, 영화 ‘박열’에서 박열 의사와 후미꼬가 옥중결혼을 한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이봉창 의거는 백범과의 믿음에서 가능했다. “일전에 선생께서 돈뭉치를 주실 떄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어떻게 믿으시고 이렇게 큰돈을 주시나 해서입니다. 제가 이 돈을 떼어먹더라도 조계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시는 선생님이 저를 어찌하시겠습니까? 저는 평생 이토록 신임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과연 선생님의 도량은 영웅적이십니다.” 두 분이 마지막 밤을 함께 하며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이봉창 의거는 저격에는 비록 실패했으나 실패는 아니었다. 적의 심장부에서 제국주의의 신적 존재인 그들의 ‘천황’을 저격함으로 써 전 세계에 우리의 민족혼이 살아 있음을 알렸고, 침체해 있던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새로운 전기를 제공했다. 중국 언론들도 불행부중(不幸不中-불행히 맞지 않음)이라고 1면에 특필함으로 써 일본과 관계악화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뒤이은 윤봉길 의거 등의 동력으로 작용한 점도 의미가 크다. 윤 의사의 종손(從孫)인 배우 윤주빈은 ‘역사저널 그날’에서 미혼인 이봉창 의사의 제사를 윤 의사의 가문에서 챙긴다고 밝혔다. 윤봉길 의거에 이봉창 의거의 영향을 확인해 준 셈이다.

일제강점기는 우리민족에게 암흑의 시대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지난 오천년 역사 이래 의·열사들이 나라를 위해 그토록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이봉창 의사를 비롯해 뜨거운 가슴으로 조국에 목숨 바치신 모든 분들의 우국충정을 세세손손 민족의 핏줄 속에 새겨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