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톡,내맘속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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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움뉴스 기자
  • 승인 2019.11.22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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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소영 수필가

 

요즘 며칠 주말 야근까지 매우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피곤이 쌓이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작업을 하다가 불평불만을 해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같이 작업하는 사람도 찡그린 얼굴로 조금만 막힘이 생기면 나와 같이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우린 웃음이 터졌다.

"만약 이 상황에서 우리가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면 참 최악이겠다. 그렇지?"

피곤이 누적되어 몸까지 아프고 정신이 몽롱해지자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달라졌다. 친절함을 유지하다가도 대하는 사람이 조금만 나와 맞지 않으면 쌀쌀한 태도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극한 상황이 되면 이렇게 달라지는 걸까?

극한 상황이라는 것은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의 철학에서 나온 용어로, 자신이 변화시키거나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이 직면하는 대부분의 상황은 인간이 영향을 주어 변화시킬 수 있지만, 죽음, 고통 등 인간의 존재를 한정 짓는 궁극적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을 극한 상황 또는 한계 상황이라고 한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이처럼 인간을 고독과 절망으로 억누르는 극한 상황을 피하지 않고 맞부딪치면서 존재 자체에 대한 각성을 이루고 사랑과 초월자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순례길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긴 여정에서 오는 육체와 정신적인 고단함 속에서 자신도 몰랐던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극한 상황이 되면 숨겨져 있던 온갖 모순들을 쏟아내게 되어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진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인가 보다.

사실 이번 일을 통해 나 자신에게 놀라기도 했다. 그동안 명상과 인성교육을 통해 인성이 많이 갖추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많은 모자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같이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어려움이 덜 해지기도, 더 해지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이번 일을 통해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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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힘든 상황이 되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서 나의 모자람을 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법륜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화가 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스님을 이렇게 답을 하셨다.

"어떻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다만 얼마나 빨리 본래의 나로 돌아올 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법륜스님의 말씀처럼 우린 극한 상황에서는 화를 낼 수도 있지만 화를 내고 있는 나를 알아보고 다시 본래의 평정심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도 불평불만을 하고 있는 나를 얼른 알아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빈부 격차는 어느 사회에서나 있기 마련이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유민주주의 등 사회 구조가 달라도 빈부 격차를 바라보는 시각차는 언제나 사회문제의 한 편을 차지한다. 금수저, 흑수저 논란을 낳는 우리나라는 그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고 벽만 두꺼워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사는 곳과 부모의 소득에 따라 차별과 혐오를 담은 신조어가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큰 문제다.

월거지(월세 사는 거지), 전거지(전세 사는 거지), 빌거(빌라 사는 거지), 엘사(LH 사는 사람) 등은 단순한 놀림거리가 아니다. 사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차별과 혐오로 낙인을 찍어 버린다. 소득이 적은 부모에 대한 차별은 더 노골적이다. 대놓고 벌레 취급이다. 이른바 월수입이 200만 원 이하면 이백충, 300만 원 이하면 삼백충이라고 놀려댄다. 동심은 온데간데없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이런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표현이 일상화된 데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는지 잘 보여준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우스갯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지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입에서 이런 표현들이 나오는 데는 어른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다름 아닌 어른들이 사는 곳과 부모의 소득을 파악해 친하게 지낼 것인지, 멀리할 것인지 친구 관계를 대놓고 정리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한국 부모와 미국 부모, 일본 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특징이 생각난다. 즉, 미국 부모는 자녀에게 늘 봉사와 기부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일본 부모는 항상 상대에 대한 배려부터 이해시킨다고 하는데 우리는 어떨까. 한마디로 아이가 절대 기죽지 않고, 경쟁에서 이기기만 가르친다. 그런 만큼 '월거지', '전거지', '빌거', '엘사' 등의 표현은 아이들의 친구 관계를 어른들이 멋대로 갈라놓는다. 미국과 일본 부모의 자녀교육이 새삼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