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적 구성으로 보면 지극히 허술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지에 가까운형식이 그렇고, 편년체인 시간의 순서대로 한 여성의 삶을 기록해 나간 것도 그렇고, 당사자가 아닌 정신과 의사의 진료 상담 기록 같은 서술 방식이 그렇다. 어쩌면 어느 한 사람의 일기장을 정리해 놓은 것 같다.
작가 조남주의 이같은 선택은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리얼리티와 일반화의 개인화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 차별에 관한 각각의 에피소드 뒤에 사회적 관련 사실들을 붙여 놓은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런데 영화 <82년생 김지영>(감독 김도영)은 소설이 정해놓은 길대로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소설의 뜻을 배반하거나 왜곡하지도 않았다. 그것을 양손에 들고 영화가 가야할 길로 갔다. 베스트셀러라고, 영화도 같은 길을 가야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면 편안히 성공이 보장된다는 법도 없다.
소설이 가진 페미니즘 담론에 기대를 건 사람들은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오로지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저것도 내 세상이고, 그것 역시 너의 세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소설이 집착으로, 아니면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들까지 함께 보려했다.
영국의 문화학자인 존 피스크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고 했다. 소설도 물론이다. 아무리 허구와 상상을 섞어도 이야기 속에 세상에 대한 시선이 들어있다. 이 땅의 여성 억압과 차별을 고발하는 <82년생 김지영> 역시 정치적이고,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단순히 소설의 차원을 넘어 페미니즘 담론의 중요한 텍스트가 되었고,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우리 모두의 평등한 시선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행운은 아니다. 이 땅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뿌리 깊고, 역사 깊은 여성억압과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이 표면화되고, 용기 있는 행동들과 만남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담고 있는 담론이 어떤가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하다. 여전히 우리사회는 성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소설 <82년생 김지영>까지 양극단에 가져다 놓고 있으니까. 소설이 그렇듯 영화에 대한 평가 또한 각자의 몫이다.
다만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 소설보다는 영화가 그 양극단의 폭을 좁혀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유는 영화다운 선택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플롯을 무시했고, 소설적 상상력이 나 극적 긴장감을 의도적으로 버렸다. 그보다는 주제와 그것에 대한 담론이 더 중요했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우리사회의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를 감안하면 얼마든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그럴 수 없다. 영화까지 그런 모험을 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현명했다.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마음을 조금 더 열고 김지영만이 아닌 주변의 사람들까지 둘러본다. 거기에는 당연히 어머니 미숙(김미경 분)과 언니 김민정(공민정 분), 직장동료들이 있고 나아가 남성인 아버지(이얼 분)와 남편인 정대현(공유 분)도 있다. 어느 한 여성의 시점이 아닌 우리 모두의 시선으로 김지영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 땅에 사는 여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소설이 가진 여성 중심의 불평등한 현실을 버리지 않고 곳곳에 배치한다.
영화가 말해주는 김지영의 희망
소설에서 김지영의 ‘빙의’는 산후우울증이 가져온 정신적 병리현상이고, 피해자로서의 잠재의식의 표현이지만 영화에서 그것은 상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 소통의 방식이다. 그 공감은 외할머니에 빙의된 자신의 딸을 본 미숙이 “어쩌다 내 새끼가 이렇게 됐어”라는 말로 딸에게 감춰왔던 속마음을 전하는 장면에서 극대화 된다.
어머니 미숙은 물론 그와 비슷한 삶을 산 수많은 여성들, 그리고 남편 정대현과 이 땅에 남편과 아버지로 살아온,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미안하고 아프고 울컥하게 만든다. 아내의 그런 모습에 마음 아파하면서 자신이 가해자일지 모른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는 남편 정대현의 모습도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영화적 선택들이 소설이 가진 적대감과 이분법보다 공감의 폭을 넓힌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안다.
김지영의 어머니 미숙이 말한 “그때 여자들은 다 그러고 살았어”, “요즘 애 엄마들은 다 이러고 살았어”의 ‘그러고’와 ‘이러고’가 어떤 것인지. 과거 나의 어머니가 그랬고, 지금의 내가 그렇고, 어쩌면 미래의 내 딸이 그럴지도 모른다. 소설의 김지영도, 영화의 김지영도 곳곳에서 걸려 넘어지고 깨지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거와 현재의 비극과 모순, 절망과 분노를 일깨우려 한 소설의 김지영과 달리 영화의 김지영은 연민과 공감, 울림을 지나 열림과 희망으로 나아갔다. 남편과 아내가 손잡고 길을 건너고, 남편과의 역할 전환으로 김지영이 다시 일을 시작하는 그 ‘희망’과 ‘열림’이 영화가 가진 얄팍한 상업적 전략에서 나온 ‘판타지’라고 해도 이 또한 어쩔 수 없다. 무책임하게 현실을 왜곡한다고 욕해도 할 수 없다. 영화는 그래도 늘 아름다운 세상, 보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게 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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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김혜원 피엠픽처스 대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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