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트 톡톡] 펭수 전성시대
[트렌트 톡톡] 펭수 전성시대
  • 도움뉴스 기자
  • 승인 2020.02.05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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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하재근(대중문화 평론가, 저자) 사진 제공 EBS

‘펭수’ 전성시대

가히 ‘펭수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특히 젊은 직장인 사이에 ‘직통령(직장인들의 대통령)’으로 통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펭수는 어떻게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하재근(대중문화 평론가, <TV쇼크> 저자) 사진 제공 EBS


 

 

 

 
2030 직장인의 ‘사이다’가 되다

EBS 캐릭터 ‘펭수’가 2019년 한 취업 사이트 조사에서 방송·연예 분야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캐릭터가 실존 인물을 제치고 1위에 오른 건 최초. 구글 코리아는 2019년 올해의 인기 검색어 순위를 발표하면서 ‘인물 및 펭귄’ 분야를 신설했다. 그동안은 인물 부문만 선정했는데 펭수의 인기 때문에 펭귄 범주를 추가한 것이다. 2020년 1월 1일 자정에는 서울 시민의 추천으로 펭수가 제야의 종 타종 행사에 함께하기도 했다.


펭수는 원래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만든 캐릭터다. 뽀로로 같은 기존 EBS 캐릭터가 주로 영유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EBS와 멀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요즘 초등학교 고학년은 성인 예능 프로그램을 즐긴다”는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펭귄 캐릭터를 만들었다. 펭수의 나이를 열 살로 설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펭수의 등장에 의외로 2030 직장인이 열광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동용 프로그램의 한 코너로 시작했다가 별도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방영 시간도 직장인 퇴근 시간 이후로 옮겼다.

직장인들의 반응이 뜨거워진 건 <이육대(EBS 아이돌 육상대회)> 때부터다. 역대 EBS 캐릭터와 펭수가 체육대회를 한다는 설정인데, 마냥 순수해 보이기만 하던 EBS 캐릭터들이 이 프로그램에서는 연차를 내세우며 선후배 위계질서를 따졌다. 이에 펭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며 불공정한 경쟁 구도에 항의했다. 바로 여기에 직장인들이 반응했다. 성인들의 사회를 풍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 펭수는 본격적으로 선을 넘기 시작했다. 일단 PD를 대하는 태도부터 다른 연예인과 다르다. PD를 “매니저”라고 부르며 궂은일을 아무렇지 않게 시킨다. 최근에는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출연해 PD를 막 대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EBS 캐릭터 사상 초유의 ‘불량’ 캐릭터다. 독설로 유명한 개그맨 박명수조차 PD 앞에서는 언제나 공손한데, <놀면 뭐하니?> 속 펭수의 불량함에 PD 앞에서 쩔쩔매던 출연진이 놀라기도 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수직적 위계질서에서 답답함을 느끼던 젊은 직장인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준 것이다. 자기가 현실에서 할 수 없는 행동을 펭수가 대신해주니 말이다.

펭수의 불량함, 그 결정타는 사장 호출이었다. 방송가에서 사장은 절대 성역으로 연예인이 그 이름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펭수는 “참치는 비싸, 비싸면 못 먹어, 못 먹을 땐 김명중”이라며 툭 하면 사장을 ‘돈줄’로 호출했다. 시청자들에게 이런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선을 넘은 녀석, 그래서 인기 만점

젊은 직장인들은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해 수직적 위계 구조의 쓴맛을 배워가는 중이다. 어릴 땐 수평적 사고방식을 배우며 자랐지만, 직장에 들어가 새로운 질서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다. 우습게만 보던 일명 ‘꼰대’들이 내 생사여탈권을 쥔 무서운 어른들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비로소 ‘선(線)’을 배우는 것이다. 넘어선 안 되는 선, 함부로 넘으면 쓴맛을 보게 되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펭수는 여봐란듯이 선을 넘는다. PD부터 사장까지 거침없다. 이제 막 선의 무서움을 배운 젊은이들은 펭수의 선 넘는 모습에 열광했다. 또 요즘 젊은 세대는 ‘자신이 소중하다’는 자존감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란 세대이기도 하다. 이 부분도 수직적 위계질서, 권위주의와 충돌한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직장인들은 펭수의 선 넘는 하극상 불량 행각에 더욱 통쾌함을 느낀다. “난 힘든 사람에게 힘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힘든데 힘내라고 하면 힘이 납니까?”라는 훈계가 아닌 공감. 이런 펭수의 한마디에 젊은 직장인은 위로받기도 했다. 여기에 요즘 젊은이의 취향, 즉 고급스러움보다는 웃음과 공감에 초점을 맞춘 ‘B급 감성’을 즐기는 경향도 펭수의 인기에 한몫했다.

펭수의 경제적 파급 효과는 당장 다양한 펭수 상품의 인기로 나타난다. 올해도 여러 분야에서 펭수 콘텐츠가 연이어 등장할 전망이다. 무분별한 벤치마킹으로 저작권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만 어른들을 겨냥한 캐릭터 산업이 부흥할 것이라는 예측에는 이견이 없다.

펭수의 인기는 우리 사회의 경직된 수직적 위계질서 문화를 반성하게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강국 대한민국이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는 벤처·지식 창조산업 발전에는 더딘 이유가 바로 ‘수직적 질서’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실리콘밸리의 수평적이고 자유분방한 문화에서 혁신적 IT 기업을 만들어내는 미국에 비해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펭수로 인해 우리 발목을 잡는 수직적 위계질서 문화를 되돌아본다. 우리나라도 상사를 편하게 부르는 게 더는 충격이 아닌, 그런 사회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