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바야흐로 트로트 전성시대다.
TV를 켜기만 하면 물밀 듯 넘쳐나던 먹방이 이제는 트로트로 대체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도대체 무엇이 그저 옛 노래로 치부하던 트로트를 이렇게 뜨거운 트렌드로 만든 걸까.

지금은 트로트 전성시대
얼마 전 종영한 TV조선 오디션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터트롯> (이하 <미스터트롯>)은 마의 시청률 30%(닐슨코리아 집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종편 프로그램으로는 사상 최고 시청률인 데다, 현재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하고 있는 모든 예능 프로그램이 감히 넘보지 못하던 수치다. 시청률만 높은 게 아니다. 화제성 지수도 1위다. 이는 <미스터트롯>이 시청률 지표인 중·장년 세대는 물론이고, 화제성 지수를 이끄는 젊은 세대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다는 의미다.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은 유산슬이라는 예명으로 트로트 가수에 도전해 돌풍을 일으켰다. 김태호 PD가 <무한도전>의 시즌 종료를 선언하고 1년여간 휴식기를 거친 뒤 선보인 <놀면 뭐하니?>는 방영 초기 그의 낯선 시도 때문에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제기되었지만, 이른바 ‘유산슬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지금은 MBC를 대표하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이 프로젝트는 유산슬은 물론, 트로트업계에서 일해온 박현우 작곡가, 정경천 편곡자, 이건우 작사가까지 스타 반열에 올려놓았고, 함께 참여한 진성, 김연자, 홍진영 같은 트로트 가수도 주목하게 만들었다.
<미스터트롯>과 ‘유산슬 프로젝트’의 성공에 힘입어 트로트를 소재로 하는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왔다. MBC 에브리원 <나는 트로트 가수다>는 과거 <나는 가수다>의 트로트 가수 버전으로 화제를 모았다. MBN은 8%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보이스퀸>의 후속으로 <트로트퀸>을 시작했다. KBS <노래가 좋아>는 ‘트로트가 좋아’라는 특별 기획을 통해 ‘조명섭’이라는 젊은 트로트 스타를 발굴했다. SBS <트롯신이 떴다>는 설운도, 김연자, 주현미, 진성, 장윤정 같은 쟁쟁한 트로트 가수들이 베트남 호찌민에서 벌이는 트로트 버스킹을 선보여 첫 방송에 무려 14.9%라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K-팝을 넘어 K-트로트 열풍을 이어가겠다는 기획 의도에는 최근 곳곳에 일고 있는 트로트 열풍이 어디까지 확장되고 있는지 실감하게 한다.
이 밖에 기존 예능 프로그램도 최근 주목받고 있는 트로트 가수를 출연시키기 위해 분주하다. KBS <불후의 명곡> 같은 음악 프로그램뿐 아니라 KBS <해피투게더>나 MBC <라디오스타> 같은 토크쇼, 나아가 SBS <미운 우리 새끼>, MBC <나 혼자 산다>, <전지적 참견 시점> 같은 관찰 예능 또한 트로트 가수들이 대거 출연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트로트 열풍의 신호탄을 쏘았나
트로트 열풍의 신호탄을 쏜 프로그램은 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이하 <미스트롯>)이다. 트로트 오디션이라는 콘셉트가 TV조선의 주요 시청자층과 맞아떨어져 최고 시청률 18.1%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기는 시너지를 만들었다. 과거 Mnet이 <트로트엑스>라는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했지만 당시 시청률이 1%도 넘지 않은 건 채널의 주요 시청자층과 프로그램의 소재가 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스트롯>이 단지 프로그램 소재와 플랫폼의 시너지 때문에 트로트 열풍을 일으킨 건 아니다. 거기에는 ‘송가인’이라는 출중한 준비가 된 스타가 있었다. 그래서 <미스트롯>이 끝나고 나서도 송가인 신드롬은 계속되었다.
후속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은 <미스트롯>의 후광 효과를 톡톡히 얻었다. 이미 트로트 가수 사이에는 ‘이 프로그램에서 성공하면 신드롬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며 기회의 장으로 각인되었고, 따라서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트로트 가수들이 출연을 희망했다. 현역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임영웅이나 영탁 같은 프로 트로트 가수는 물론이고, 한때 영재로 불린 울산 이미자 김희재, 리틀 남진 김수찬, 대구 조영남 이찬원, 양지원, 정동원 같은 쟁쟁한 실력을 갖춘 가수가 출연했다. 그들만이 아니다. 로커로 유명한 Y2K 고재근이나 고등학생 파바로티로 불린 테너 가수 김호중, 뮤지컬 배우 신인선, 아이돌 가수 황윤성 같은 타 장르의 가수들까지 트로트 경연에 뛰어들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관건은 결국 얼마나 실력 있는 출연자가 무대에 서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미스터트롯>은 시작부터 그 열풍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통 트로트부터 기예에 가까운 갖가지 쇼를 더한 트로트, 게다가 아이돌 무대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를 곁들인 트로트까지, <미스터트롯>은 보는 재미, 듣는 재미를 모두 만족시키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미스트롯>이 만든 트로트 열풍의 불씨가 <미스터트롯>으로 활활 타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 불길은 대중문화 전반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미스터트롯>과 유산슬이 확장시킨 트로트 소비 세대
최근 일어난 트로트 열풍이 단지 트로트라는 소재와 TV조선 같은 플랫폼이 일으킨 시너지만이 그 원인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KBS <가요무대> 같은 오래된 트로트 프로그램이 있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물론 <가요무대>는 늘 9%에 달하는 높은 시청률로 동시간대 방영되는 드라마를 압도해온 프로그램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이 프로그램을 트로트 열풍의 주역으로 꼽지는 않는다. <가요무대> 시청률은 일부 고정 시청자층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미스터트롯>을 트로트 열풍의 주역으로 삼는 건 이 프로그램이 특정 세대가 소비하던 트로트라는 장르를 전 연령대가 즐길 수 있도록 확장한 데 기인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특성상 출연자들이 젊을 수밖에 없다. 즉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람들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20대가 주축이고, 10대도 적지 않다. 30~40대 출연자가 간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출연자들의 면면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은 트로트가 나이 든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드러낸다. 게다가 출연자들이 보여주는 퓨전 트로트는 댄스 퍼포먼스와 성악, 록, 국악 같은 다양한 장르의 소비자까지 트로트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정통 트로트의 맛을 조금씩 전파하고 점차 여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로써 트로트는 과거에서 현재로 점점 걸어 나온다. 여기서 이 프로그램이 제작 당시 참가자들을 추리고 추려 101명의 후보를 세웠다는 점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한때 화제의 중심에 섰지만 조작 논란으로 고개를 숙인 Mnet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101>의 트로트 버전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시대가 가고 이제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시대가 도래했다는 선언 같기도 하다.
<놀면 뭐하니?>의 유산슬 프로젝트는 트로트에 대한 접근 방식에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B급 코드를 활용함으로써 주목하게 만들었다. 즉 한 곡을 쓰는 데 몇 분이면 된다는 작곡가의 자화자찬과 실제로 그렇게 뚝딱 만든 곡이 의외로 괜찮은 결과로 이어지는 재미다. 그 과정에서 ‘박토벤’이라 불리는 박현우 작곡가와 ‘정차르트’로 불리는 정경천 편곡자의 만담에 가까운 언변 궁합은 이 프로그램의 B급 유머에 불을 지폈다. 얼마 되지 않는 예산으로 카메라가 해야 할 것을 출연자가 대신하면서 찍어내는 뮤직비디오 제작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물론 제작비를 충분히 쓸 수 없는 현실이 반영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손을 거친 제작 과정은 그 자체로 시청자에게 놀라움과 웃음을 안겨줬다. 트로트는 유산슬 프로젝트를 통해 그렇게 젊은 세대에게 한 걸음 더 친숙한 장르로 다가섰다.
트로트, 뉴트로, 밀레니얼
트로트 열풍의 또 다른 관점은 지금 현재 젊은 세대에게 각광받는 뉴트로(new+retro)의 한 경향이라는 시각이다. 디지털의 끝단에서 태어나 아날로그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옛것’은 향수나 추억이 아닌 ‘새로운 것’으로 다가오는 것. EDM 같은 전자음으로 만드는 음악의 시대에 수작업으로 만든 조금 고풍스러운 음악이 새롭게 들리는 것이다.
물론 트로트는 이제 옛 노래가 아니라 현재의 음악 생태계에 적응하고 있는 장르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는 트로트와 EDM의 융합을 통해 젊은 세대를 춤추게 하는 트로트가 되었다. 그런데도 조명섭처럼 마치 축음기에서 나올 법한 옛 노래를 옛 창법 그대로 노래하는 데서 느껴지는 아날로그의 맛은 트로트만이 가진 묘미가 아닐 수 없다.
뉴트로를 이끄는 밀레니얼 세대의 ‘개성을 추구하는 문화 소비 방식’ 또한 트로트를 보다 친숙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밀레니얼 세대는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취향에 따른 소비를 선호하고, 또 남다른 개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뉴트로 같은 색다른 소비를 밀레니얼 세대가 주도하는 이유 중 하나다. 트로트 역시 그런 점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색다른 소비 취향’ 중 하나로 떠올랐다.
그저 옛 노래로서 향수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던 트로트는 사실 민요가 지닌 흥과 한을 담은, 중요한 우리네 음악적 유전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가요계에는 발라드든 록이든, 이른바 ‘뽕’ 요소가 있어야 뜬다는 이야기가 늘 있었다. 그렇게 트로트는 우리 대중문화 속에 잠재되어 있었다. 드디어 때를 만나 그 모습이 전면에 드러났을 뿐이다. 트로트 열풍은 트로트라는 우리 고유한 장르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