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균태권도TV,제4강 호국보훈의 달을 맞은 ‘월남태권도교관단’ 이야기
오노균태권도TV,제4강 호국보훈의 달을 맞은 ‘월남태권도교관단’ 이야기
  • 도움뉴스 기자
  • 승인 2020.06.01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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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균테권도TV 개국방송 부터 제3강 까지
게시일: 2020. 5. 31.

오노균 태권도TV 제4강(6/1:10:00)

전국의 태권도 가족 여러분
해외에서 태권도를 종교처럼 받들며 민간외교관으로 국위를 선양하고 계시는 해외태권도 사범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오노균TV' 제 4강에서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나라사랑과 태권도 세계화를 다짐하는 뜻에서 ‘월남태권도교관단’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이역만리 월남 땅에서, 지금은 베트남이라 칭하고 있습니다만, 나라의 명령을 받고, 자유수호를 위해 참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파월 태권도 교관단 여러분의 숭고함에 경의를 표하고 먼저 가신 선배 영령들께는 평안한 영면을 기원 드립니다.
이분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태권도가 세계 속의 태권도로 성장한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금도 국내와 해외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파월태권도교관단 여러분! 존경합니다.
저도 그 숭고함을 유지, 발전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도복을 착용하고 본 방송을 시작 합니다.
한국 태권도의 역사에서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태권도교관단의 파병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태권도 세계화의 양적 풍족함에도 불구하고 태권도교관단의 베트남 파병과 활동에 대하여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충분하게 공감되지 못했던 것도 사실 입니다.
베트남전쟁 기간 한국군 태권도교관의 참전은 1964년 10명으로 시작 되었지만 그 이전인 1959년 3월 2일 베트남 고 딘 디엠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우리군 태권도 시범단 15명이 순회시범을 하며 시작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1962년 남태희, 김승규, 정영휘, 추교일 사범등 네 분의 교관이 파월되어 태권도 보급을 원조로 1966년에는 파월 한국사령부의 직할부대인 태권도 교관단이 편성 되고 규모가 확대 되었습니다.
1973년 3월 12일 파월군 철수까지 657명의 태권도 교관단이 활동하였으며, 그 가운데 남태희, 백준기, 최동희, 김석규, 고재천, 김봉식, 정병길, 김승규, 유형선, 홍금식 등 열 분은 교관단장으로, 그 외 647명은 교관요원으로 군과 시민들에게 태권도를 보급하고 지도했습니다.
파병기간 지도한 수련인원은 총 229,913명이고, 유단자는 2,916명이 배출되었는데 그의미를 살펴 보면, 베트남 전쟁시 한국군 태권도교관단의 역할은 전쟁수행의 수단 측면과 한국형 군사원조의 시초라는 측면에서 크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태권도 교관단은 비록 총을 들고 적과 싸우는 조직은 아니었지만, 전쟁수행 수단으로서 민사작전, 첩보수집, 대적 심리전, 베트남 현지의 우리 교민등 보호수단의 역할을 톡톡하게 수행했던 것 입니다.
또한 태권도 교관단의 태권도 기술 전수는 베트남에 국한되지 않고, 인접국인 캄보디아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한국군이 해외에 제공한 첫 번째 군사원조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한국형 군사원조의 시초이자 모델이라고 할 수 있으니 자랑스럽게 평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태권도의 역할은 현재도 해외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부대에서도 충분히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앞으로 태권도 역사에서 한국군 태권도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평가는 크게 내려질 것으로 확신 합니다.
그러면 1964년 9월 12일 역사적인 제1차 파병으로 이동외과 병원와 태권도교관단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간단히 살펴 보겠습니다.
1964년 3월 17일 미국의 존슨 정부는 베트남 사태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것을 공식적으로 결정하고 “베트남 사태에 대처 하기 위해 보다 많은 우방국을 끌어들여 국제사회의 참여와 지지를 얻어낸다.”는‘(모어 훌레그)’More Flags’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1964년 5월 9일 한국 등 25개 우방국에게 남베트남 지원을 요청하게 되는데 당시 미국 정부가 한국에 보낸 서한(書翰)에는 ‘1개이동 외과병원’을 파병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건군 이후 최초의 해외 파병을 위한 한국정부의 조치가 공식화 되기 시작한 것 입니다.
한국군 파병에 대한 당시 정부의 입장은 “공산 침략을 받고 있는 남베트남 사태는 한국의 안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국가안전보장의 측면과, “6·25전쟁 시 도와준 자유우방에 보답한다.”는 국제적 신의(信義)의 차원이었기 때문에 국민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공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와 같은 분위기에 따라 국방부는 파병을 위한 조치를 구체화해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과 10명으로 편성된 태권도 교관단 등 140명을 파병하기로 결정 하였는데, 국회에서는 1964년 7월 31일에 ‘파병동의안’을 만장일치 가결 하였습니다.
따라서 1차로 파견되는 주월 태권도교관단은 1964년 9월 23일 사이공에 파견되어 남베트남 육군보병학교와 육군사관학교 및 해군사관학교에 각각 3명씩 배치 되어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공식적 베트남 태권도 지도의 효시가 되는 것입니다
주월 한국군 태권도교관단의 활동은 대단하여 1971년 철수 당시 154개의 도장에서 총 29,000여 명의 유단자가 배출됐으나 終戰이후 외교관계의 단절로 더 이상의 보급이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20년만인 1992년 베트남에 태권도 시범단을 파견 하여 다시 진출하였는데, 대한태권도협회는 베트남올림픽위원회의 초청에 따라 국기원 4대 원장을 지내신 姜元植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전무를 단장으로 하는 국가대표 시범단 14명을 베트남에 파견 했습니다.
이는 1991년 체결된 韓.베트남 간 체육교류협정에 따라 베트남 측이 호치민에서 열리는 국제태권도대회에 한국팀을 초청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으로 양국간의 체육교류 활성화의 단초가 되고 스포츠외교를 통한 우호 협력증진에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월 태권도 교관단은 태권도 대한민국 국기로서 자리매김하는데 산파 역할을 담당 하였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태권도가 호국무예요 상무 정신의 선봉으로 자유평화를 지키는 수호자로 우뚝 설수 있는 계기가 된것입니다.
그래서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파월 태권도 교관 여러분들을 "평화 태권도 영웅"으로 높이 찬양 하고 위로를 드리면서 O&K 태권도 tv 제4강을 마치겠습니다.
제5강은 6월 8일 월요일 10시에 건강히 다시 뵙습니다. 감사 합니다.

#국기태권도 #월남태권도교관단 #호국보훈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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