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와 스님
거지와 스님
  • 도움뉴스 기자
  • 승인 2020.06.01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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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태호 중부대학교 교수
사진 최태호 중부대학교 교수
사진 최태호 중부대학교 교수

 

필자는 어디 가도 말을 잘 안 한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학회에 가서도 그렇고 대학원 제자들과 있을 때도 주로 듣는다. 나이 많은 제자들이 많은 것도 이유일 수 있지만 필자가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말할 기회를 잃게 되고, 필자의 말이 모범답안처럼 들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말할 기회를 많이 주기 위함이다. 말을 듣다 보면 전혀 말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가 있다. 아주 틀린 것이면 수정해 주지만 크게 해가 되지 않는 것은 못들은 척하고 넘어간다.

 

어제는 오랜만에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석가탄신일이라 평소 존경하는 스님의 절에 가서 축사도 하고 공연도 관람했다. 김문숙 명창이 경기민요로 시원하게 귀를 뚫어주었고, 이어 모노드라마 품바 공연이 이어졌다. 연극의 참맛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짧은 시간에 맞춰 공연하다 보니 요점만 간단히 한 공연이지만 관객과 호흡을 맞춘 참 좋은 공연이었다. 각설이타령과 함께 각설이의 세상풍자가 시원하게 더위를 식혀준 하루였다.

각설이의 공연 중에 각설이와 거지의 의미에 관한 내용이 있어서 인용해 본다. 각설이 왈 “각설이는 깨달을 覺에 말씀 說자로 깨달은 사람의 말씀”이라고 했다. 재미있는 말이지만 민간어원설이다. 스토리가 길어서 이에 관해서는 다음 번에 길게 논하기로 하고, 거지에 대한 그의 정의를 다시 한 번 들어 보기로 하자. “거지란 말야, 글 巨자에 알 知자를 쓴단 말야. 그러니까 크게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라고 하면서 거지가 학문적으로 도통한 사람이라는 쪽으로 유도하여 웃음을 자아내었다. 역시 연극은 풍자가 있어야 제맛이다. 그 누가 거지를 ‘깨달은 사람, 도통한 사람’이라고 한자로 그려낼 수 있을까? 모두 흐뭇해하면서 점심 식사 시간까지 그 대화가 이어갔다. 필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난 해(2019) 5월 5일 [국민투데이]에 ‘건달, 깡패, 양아치’에 관한 글을 썼기 때문이다. 그 글에서 약간의 의미 분석을 했는데, 그 좌석에서 한국어 전공자가 아는 척을 하면 그 분위기는 썰렁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제 지면을 빌어 거지의 진정한 의미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거지’는 ‘거러치에서 유래한 말로 거와 지의 합성어’다. “거러치(걸인(乞人)는 ‘거러’와 ‘치’의 합성어로 ‘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이치, 저치할 때 말하는 ‘치’가 그것이다. 작년에 말한 ‘양아치’의 ‘치’도 여기에 해당한다. ‘치’가 사람을 뜻하는 것은 만주어에서 유래했다. ‘누루하치’의 ‘치’가 바로 그것이다. 동냥아치, 양아치, 장사치 등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거러’는 ‘걸’에서 유래한 말이다. ‘걸뱅이’를 황해도에서는 ‘거러지’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걸인(乞人)이라는 우리말의 변형이다. ‘거러치> 걸치> 거지’로 변형되어 오늘날의 거지라는 단어가 형성된 것이다. ‘거지(居知) = 크게 아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풍자요 해학일 따름이다. 결국 한자어 걸(乞)도 우리말과 어원이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지의 사투리를 보면 ‘거러지, 거렁뱅이, 거러시, 거랭이, 걸바시, 걸뱅이, 걸버시, 걸빙이’등이 있다. <서정범, 새국어어원사전> 그러므로 그 어근이 ‘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동냥아치에 대한 것인데, 이미 작년 칼럼에서 기술했기에 요점만 쓴다. 스님 중에 탁발승이 있다. 탁발하는 승려를 말하고, 탁발은 승려가 마을을 다니면서 음식을 구걸하는 일을 말한다. 걸식(乞食)으로 번역하며 땡추중이라고도 했다. 중국에서는 송(宋)나라 때부터 탁발로 통했다. 탁발은 인도에서 일반화되어 있던 수행자의 풍습이 불교에 도입된 것인데, 중국·한국의 불교에서, 특히 선종에서는 수행의 일환으로도 간주된다. 본래의 취지는 수행자의 간소한 생활을 표방하는 동시에 아집(我執)과 아만(我慢)을 버리게 하며, 속인에게는 보시하는 공덕을 쌓게 하는 데 있다. 동냥은 원래 불교용어 동령(動鈴)에서 나온 말이다. 동령이란 ‘요령을 흔들고 다닌다’는 뜻이다. ‘요령’은 원래 금강령(金剛鈴)을 가리키는 말인데, 금강령이란 옛날 불교 의식에서 쓰던 도구로서 번뇌를 깨뜨리고 불심을 더욱 강하게 일으키기 위해서 흔들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의 스님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 탁발에 나설 때 요령을 흔들고 다니게 되면서부터 동령을 ‘구걸’과 같은 뜻으로 쓰게 되었다.<다음백과> 이 동령이 동냥으로 변음되면서 오늘날 ‘동냥아치>양아치’, ‘동냥주머니’ 등의 말이 생기게 되었다.

민간어원이 오래 되다 보면 진짜어원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흥미와 학문의 중간에서 모두 간직하고 싶은 욕망이 인다. 연극인 각설이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