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오서산 (김석회/ 전 가톨릭대학교 부총장)
추억의 오서산 (김석회/ 전 가톨릭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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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7.04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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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회/ 전 가톨릭대학교 부총장
김석회/ 전 가톨릭대학교 부총장

오서산은 충남에서 세 번째로 높은산으로 높이가 790미터에 이르는 독산이다. 홀로 우뚝 서 있지만 그 위용은 장엄하기까지 한 중후함을 뽐내는 금북동맥의 정상이 만들어낸 명산중의 명산이다. 오서산은 까마귀들이 많이 서식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산으로 충남 홍성군 장곡면과 광천읍, 청양군 화성면, 그리고 보령시 청라면이 함께 품고 있는 고고함을 나 보란 듯이 뽐내는 내 고향의 자랑스러운 산이다.

나는 원래는 우리 아버지의 고향인 보령시 청라면 내원리에서 태어났는데, 내 나이 7살 되던해에 오서산을 넘어서 홍성군 장곡면 가송리 조잔 마을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오서산을 넘을 때에는 스스로 걷기도 하고 일가친척 형님의 등에 업혀서 넘게 되었는데 얼마나 멀든지 지금도 지루했던 생각이 어렴풋이 난다.

그곳 홍성군 장곡면 가송리는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그래서 그곳에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댁과 큰 이모님 댁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곳 장곡에서 장곡국민학교와 광천중학교 그리고 광천상업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곤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원래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광천상고로 진학하라고 권고 하셨는데, 그 속내는 상고라도 가서 졸업 후 금융기관이라도 들어가 동생들 교육에 도움을 달라는 속내의 뜻이셨다.

그러나 나로서는 공부가 하고 싶어서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고 대학에 가기로 결심하여 취업을 하지 않고 뜻을 이룬 것이다. 대학에 가려면 이웃 홍성에 있는 인문고등학교인 홍성고에 가야 하는데, 하숙비 때문에 그냥 상고에 가게 되었으니 그 마음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다시 오서산 이야기로 돌아가자.

오서산 위치로 말하자면, 보령시 청라면은 오서산의 남쪽에 위치해 있고, 홍성군 장곡면은 오서산의 정북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홍성군 광천읍과 청소면은 오서산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나로서는 오서산을 가운데 두고 삼개 군과 시에서 초 중 고등학교까지 살아온 셈이다. 청양군 화성면 장계리는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은 오서산의 품안에서 자라온 오서산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오서산을 나의 어버이산 이라고 부르고 싶다. 내 어릴적의 얼이 서린 곳이니까!

국민학교 때에는 해마다 오서산 계곡으로 소풍을 가곤 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김밥이며 도시락을 친구들과 함께 나눠먹으며 가재잡기도 하면서 즐겁게 놀았던 생각이 소록소록 나기도 한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때에는 광천읍 담산리에 우리 매형이 살고 계셔서 그곳에서 오서산 정상에 다녀오기도 하였고, 성년이 되어서는 보령시 청라면 명대계곡을 따라서 오서산 정상에 올라가본 기억이 난다.

산의 어느 방향에서 오르든 가파른 곳이 있어서 그렇게 쉽사리 올라가긴 쉽지 않은 산이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가 보면 서해바다를 비롯해 사방이 확 트인 게 십 년 묵은 체증도 말끔히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특히 가을철 오서산에는 억새 풀밭이 즐비해서 가는 이의 발길을 잡고 만다. 아마도 저녁 해질 무렵의 서해 낙조는 장관중의 장관이리라! 그래서 근래 전국의 등산꾼들은 오서산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오서산에는 나의 가슴 아픈 기억이 나를 우울하게 하기도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아버지와 관련된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우리 아버지는 그 멀고도 높은 오서산에 틈만 나시면 나무를 하러 가시곤 하셨다. 성년이 되어 한번이라도 오서산 등산을 할라치면 진땀이 나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런 산에 지게를 짊어지시고 그 무거운 나무를 한 바지게씩 지시고 오서산을 오르내리셨으니 그 고통이 어떠하셨을까를 상상해 보면 가슴이 메인다. 하루 이틀도 아닌데, 산에서 해오신 나무는 우리집 땔감으로도 사용하셨지만, 그것을 광천장에 내다 파시어 살림 밑천에 쓰셨으니 그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그래서 우리 아버지께서는 연세가 드셔서 등이 심히 굽으셨으니 그것은 젊어서 지게질에 찌든 탓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다. 서울 내집에 상경하시어 계실 때 하루는 목욕을 시켜드리는데 굽은 등에 뼈만 앙상한 것을 보고 나는 할말을 잃고 넋이 나간적이 있었다.

그 굽은 등에 대한 보상은 그 누가 어떻게 해 드려야 할지를 생각해 보니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그뿐이랴, 한 여름 농사철이면 오서산 밑자라락에 있는 대밭이란 들판에 밤만 되면 논의 물고관리를 하시려고 담요 한 장을 들고 나가시던 생각이 내 눈시울을 적시게 하곤 하셨다. 얼마나 고달픈 인생을 사셨는지를 회상해 보면 밤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참으로 마음 아린 추억이 오서산을 중심으로 맴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오서산을 영영 잊을 수 가 없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또 바뀌어서 많은 이들이 놀이삼아 오서산 등산길에 오르내리는데, 우리 아버지는 우리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 높은 금자동 고개를 넘나들며 나뭇짐과 싸우셨으니 그 서글픈 추억을 어디에 담아낼 수 있을까? 지금은 장곡에 고요히 묻히셨지만, 불원간 아버지의 본 고향인 보령시 청라면 옥계리 산 46번지 오서산 자락 선산에 다시 모시려 하니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맺혔던 한이 풀어지는 듯, 한결 마음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