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정신,두 죽음이 있다
국가의 정신,두 죽음이 있다
  • 도움뉴스 기자
  • 승인 2020.07.1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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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연국 세계일보 논설위원 / 페이스북
지난 13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백선엽 장군의 조문행렬
클릭하시면 헌화하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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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고백선엽장군에게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는 해리스 미국대사
명장 백선엽장군에게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는 해리스 미국대사

 

두 죽음이 있다.

한 사람은 10일 영면한 호국 영웅 백선엽 장군이다.

다른 한 사람은 그보다 하루 앞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두 사람의 삶은 4성 장군과 이등병의 계급만큼이나 달랐다.

삶의 출발부터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백선엽이 태어날 당시 조국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식민지 청년은 일제 만주국의 군관학교를 나와 중위로 근무했다.

짧은 친일 행적은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았다. 반면 해방된 조국에서 태어난 박원순은 사법고시에 합격해 탄탄한 길을 걸었다. 그는 성희롱이 범죄임을 세상에 알린 국내 최초의 변호사였다.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활동한 뒤 내리 세 번 서울시장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삶의 노정은 그 후에도 극명하게 엇갈렸다.

백선엽은 망국의 수렁에서 나라를 건져냈다.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던 미군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가장 믿을 수 있는 한국군을 다부동에 배치해달라고 요청했다. 정일권은 백선엽의 1사단을 지명했다.말라리아를 앓고 있던 백선엽 사단장은 병상에서 곧장 전장으로 달려갔다. 권총을 빼들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장병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가 밀리면 미군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으로 물러서면 나를 쏴라.” 그의 사단은 북한군에 대승을 거두고, 평양에도 맨 먼저 입성했다. 전쟁이 끝난 후 백선엽은 한·미동맹의 기반을 닦고 국군을 재건했다.

차기 대선주자로 승승장구하던 박원순은 자신이 쌓아올린 여성 인권의 탑 앞에 쓰러졌다. 여비서를 4년 동안 성추행했다는 고소장이 경찰에 접수된 다음날 혼자 북악산에 올라가 목숨을 끊었다. 사회적 혐오 범죄를 저지르고는 자살이란 사회악을 도피처로 삼았다. 사후의 풍경 역시 대조적이었다. 박원순은 전례 없는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예우를 받았다. 그의 죽음에는 국화 9500송이가 함께했다.

서울을 비롯한 국내외 분향소에는 정치인과 사회지도층,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은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로 민주화에 앞장섰던 분”이라고 치켜세운 뒤 ‘님의 뜻 기억하겠다’는 추모 현수막을 곳곳에 내걸었다.

그러나 장군의 죽음에는 논평조차 내지 않았다.

한 좌파 단체는 “백씨가 갈 곳은 현충원이 아니라 야스쿠니신사”라고 모욕했다. 보다 못한 청년사회단체들이 광화문광장에 장군의 분향소를 차렸다.

어린 자녀 둘과 분향을 마친 어머니는 “나라의 영웅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 그 나라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박경리의 ‘토지’에 “사람은 죽어 관 뚜껑을 닫아봐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죽은 뒤라야 공정한 평가가 가능하다는 뜻이겠으나 우리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국가를 수호한 사람이 존경과 예우를 받는 ‘국가의 정신’은 무너진 지 오래다. 초강대국은 달랐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은 백선엽 타계 소식에 “진심으로 그리울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라는 애도 성명을 냈다.

주한미군은 2018년 백수(白壽)를 맞은 백선엽에게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휠체어에 앉은 노병을 보자 왼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 자신의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감쌌다. 최고의 경의였다.

한국 육사가 백선엽 지우기에 나설 무렵, 미군은 그의 정신을 본받기 위해 평택기지에 ‘백선엽 홀’을 만들었다.

우리 땅을 지킨 영웅이 왜 타국한테서 예우를 받고 조국에선 홀대받는가. 임진왜란 당시 나라가 패망의 위기에서 벗어나자 한 지도층 인사는 “진실로 하느님이 도우신 것”이라고 했다.

유엔군의 도움으로 침략자들을 물리친 6·25전쟁을 두고도 하늘의 도움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체 언제까지 ‘하늘 타령’만 할 건가. 핵을 손에 쥔 김정은에 굴신하면서 호국 영웅은 푸대접하는 나라를 하늘이 과연 지켜주겠는가.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 가사처럼 하늘이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는 기적을 바라지 말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나라만 돕는다.

(배연국 논설위원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