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덕주의 문화산책,말모이와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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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26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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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갈덕주 경북대 외래교수/유네스코대구협회 이사

한글운동과 민족운동 올해는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계시지만 국내에서 마지막까지 활동한 단체를 찾는다면 크게 ‘조선어학회’와 ‘광복회’, ‘의열단’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어학회’는 주로 법조계와 국어학계에서 문화운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진행해 왔고, ‘광복회’와 ‘의열단’은 국내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해 왔다.

이 가운데 이번 호에서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문화운동을 주도해 왔던 ‘조선어학회’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조선어학회와 국문 연구 ‘조선어학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술단체인 한글학회의 전신이다. 한글학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문학술지인 『한글』을 발행하고 있는 학술단체이며, 한글날의 전신인 ‘가갸날’을 제정한 민족운동 단체이기도 하다.

근대의 국문 연구는 민족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시초는 고종 임금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시고 그 보급을 위해 ‘정음청(正音廳)’ 또는 ‘언문청(諺文廳)’이라고 하는 관청을 만드셨다.

그러다가 50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고종 임금 대인 1894년, 갑오개혁을 시행하면서 한글이 처음으로 국가 공식 문자로 승격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1896년 서재필 선생의 주도 하에 민간 영역에서 ‘독립신문(獨立新聞)’이 간행되었는데, 이때 참여한 인물이 ‘주시경’ 선생이었다.

이 당시 민간 영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국문학자가 주시경 선생이라면, 조정 대신으로서 국문 연구를 주도한 인물은 종두법 보급으로 유명한 ‘지석영’ 선생이었다.

의사이자 국문학자였던 지석영 선생은 1907년 1월 ‘국문연구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그해 7월 고종 황제의 칙령으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라는 국가 연구기관이 설립된다.

1908년에는 주시경 선생이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전국적인 국문 학술단체을 조직하기도 한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국문 연구를 바탕으로 한 애국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09년 일본에 의해 국치(國恥)를 겪으면서 국문 운동을 바탕으로 한 애국활동은 위축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론기관과 국가기관 및 학술단체에서 활동해 오던 이들이 힘을 합쳐 지속적인 모임을 추진해 가게 된다.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됨에 따라 언론기관과 국가기관에서 활동해 오던 인물들을 포함한 모든 애국지사들이 주시경 선생을 필두로 한 학술단체로 모이게 되는데, 이 모임은 1911년 ‘배달말글모음’으로 지칭하였다가 1913년 다시 ‘한글모’로 개칭하게 된다.

1919년 마침내 삼일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그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민족운동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한글모’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힘을 받아 1921년 명칭을 다시 ‘조선어연구회’로 개칭하고 조직 정비에 나선다.

1926년에는 처음으로 한글날의 전신인 ‘가갸날’을 제정하였으며, 이듬해인 1927년에는 기관지인 『한글』을 간행하게 된다. 그러다가 1931년 다시 ‘조선어학회’로 개칭하여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가장 극심했던 30년대와 40년대에 서울을 중심으로 문화운동을 주도하며 실질적인 국내 독립운동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정책에 대항해 주력했던 사업이 ‘사전 편찬’ 작업이었다. 조선어학회는 국문 사전 편찬을 위해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하였고 1936년 표준말 사정에 대한 원칙과 함께 표준말 모음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에 관한 통일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광복을 몇 해 앞두고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내란죄로 검거되어 33인이 투옥되고 그 가운데 2번이 옥사를 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조선어학회사건’이다. 그 후 1949년 한글날을 맞아 명칭을 다시 ‘한글학회’로 개칭하여 지금까지 써 오고 있다. 말모이, 우리말 사전 편찬 우리말 사전 편찬은 일제강점기 문화운동을 주도해 오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숙원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자 역사가였던 박은식 선생은 그의 저서 『조선통사』에서 국가를 국혼(國魂)과 국백(國魄)으로 구분하며, 국백을 잃어버리더라도 국혼을 잘 지키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국백은 영토이며 국혼은 역사와 언어이다. 따라서 국백을 수복하기 위해 우리 민족에게 말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시대적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반면 일제는 민족의 언어를 말살함으로써 국혼마저 상실하도록 하는 작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사전 편찬 사업이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우리말 사전 편찬의 시작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최남선 선생의 ‘조선광문회’에서 출발한다.

주시경 선생은 1911년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선생 등과 함께 ‘조선광문회’에서 『말모이』 편찬 작업에 들어간다. ‘말모이’는 말을 모은다는 뜻으로서 사전을 뜻한다.

주시경 선생 등은 사전 편찬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원고 집필에 들어갔지만 삼일운동 이후 원고 대부분이 유실되고 만다. 그 가운데 일부가 임시정부와 계명구락부로 전해지게 된다.

임시정부로 흘러 들어가게 된 배경은 삼일운동 직후 편찬자 중 한 명이었던 김두봉 선생이 원고의 일부를 가지고 상해로 망명한 것이 계기가 된다. 그 후 이윤재 선생이 김두봉 선생으로부터 원고를 받아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이후 그 명맥에 대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계명구락부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승빈 선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모임으로서 조선 황실의 종친과 사회인사들의 원조금을 모아 조선광문회의 『말모이』 편찬을 이어가는 데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1934년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이 작업도 끝을 맺지 못하고 마침내 중지되고 만다.

1914년 주시경 선생이 작고하면서 그 유지를 이어받은 인물은 이윤재 선생이었다. 이윤재 선생은 주시경 선생의 뜻을 이어 『말모이』를 완성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사전 편찬 작업을 추진해 간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활동이 ‘조선어사전편찬회’였다. 계명구락부와는 별개로 1929년 전국의 애국지사 108명이 뜻을 모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때 발기인 모집과 조직 구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 이극로 선생이었다.

이극로 선생은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 활동에서 크게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극로 선생은 애국활동에 대한 의지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에 이극로 선생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 문화계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이 모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 모임이 당시까지 조직된 문화단체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구성을 보여준다.

이 모임에는 애국지사뿐만이 아니라 친일활동에 참여한 인물들까지 매우 그 폭이 넓게 나타난다. 이는 사전 편찬에 대한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기 위한 포진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보도 기사에 실려 있는 명단을 살펴보면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등장한다.

국어학자인 ‘홍기문, 최현배, 이윤재, 정렬모, 김두봉’ 선생을 비롯하여 문학인 가운데 ‘이광수, 현진건, 홍명희, 이병기, 이은상, 주요한, 양주동, 염상섭’ 선생의 이름이 확인된다.

또한 사회인사로는 ‘윤치호, 김활란’ 선생의 이름도 보이며, 동학인 가운데 ‘이돈화’ 선생의 이름도 보인다.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상무위원은 거의 ‘조선어연구회’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두 개의 조직으로 운영되던 모임이 ‘조선어학회’로 통합되면서 사전 편찬에 관한 전권이 ‘조선어학회’로 위임된다.

1939년 조선어학회는 원고의 3분의 1 가량을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으며 원고를 대폭 수정한다는 조건 하에 1940년 출판 허가를 받게 된다. 이에 1942년 출간을 앞두고 내란죄에 연루되어 모든 업무는 중단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십 년 간 준비해 오던 원고가 유실되고 만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광복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러나 1942년 10월 전 회원이 투옥되면서 원고가 유실되었고 각 방면의 인사들이 총동원되어 전국 각지로 원고 수색을 진행하였으나 원고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9월 8일 서울역(당시 경성역) 운송부 창고 속에서 마침내 원고가 발견된다. 일본 검찰이 함흥으로 보냈던 원고를 재판 증거로 삼기 위해 다시 이송해 왔다가 경황이 없어 방치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고를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출판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고심하게 된다. 그런데 조선어학회에 뜻밖의 지원금이 들어오게 된다. 일제가 조선인 관리로부터 국방 헌금 명목으로 징수해 두었던 자금이 있었는데, 그 자금을 보관하고 있던 김영세라는 도서관 직원이 사실을 밝히며 조선어학회에 전액을 희사한 것이었다.

이에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조선말 큰사전』 1권이 마침내 간행된다. 그 후 미국의 정부의 원조를 받아 3권까지 인쇄가 진행되었으며, 4권의 조판을 끝낼 무렵 6.25전쟁이 발발하여 출판 작업은 중지되게 된다.

전쟁 중에도 사전 편찬에 대한 작업은 끊임없이 진행되었으며, 마침내 1957년 10월 9일 한글 반포 기념 511돌을 맞아 『조선말 큰사전』이 완성되게 된다.

이에 대해 당시 동아일보는 “우리의 학술 문화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우리 손으로 창조된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는 가운데 홀로 이 『큰사전』만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민족의 수난사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 마침내 『말모이』가 『조선말 큰사전』으로 태어났다.

이후 『조선말 큰사전』은 1991년 한글학회에서 간행한 『우리말 큰사전』의 토대가 되었으며, 또한 국가 주도 사전인 『표준국어대사전』과 『우리말샘』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21세기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그 어느 때보다 국가 지식 관리 시스템 정비를 위해 ‘사전 편찬’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전 세계 주요 선진국들이 모두 인공지능 개발을 위해 국가 주도 전자 사전 편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글의 창제로부터 IT 강국으로 우뚝 서기까지 60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위기의 순간마다 우리말글을 지켜온 선조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는 세계를 선도할 국가 가운데 하나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선조들의 선견지명이었을까? 제4차 산업혁명 시대가 다가올수록 『말모이』를 지켜온 선조들의 혜안에 감탄할 따름이다.

 

사진 제갈덕주 교수
사진 제갈덕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