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으로 통하다.
골목으로 통하다.
  • 성낙원
  • 승인 2019.04.29 14: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옥천문화원 - 지용제 골목투어 코스 탐방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은 5월 9일부터 12일까지 정지용 생가 일원에서 제32회 지용제를 개최한다. 행사내용으로 각종문학상시상식, 지용백일장, 전국 시 낭송대회, 전국정지용청소년문학캠프, 시인과 함께하는 시노래공연, 길거리축제, 향수음악회와 미술.사진.전통도자기 전시회 등이 열린다.

옥천문화원은 지용제 처음으로 진행되는 옥천 구읍의 골목투어 코스를 사전에 간단한 정보를 알고 탐방할 수 있도록 소개했다.

“골목으로 통하다”라는 슬로건으로 처음 실시되는 골목투어는 단순한 설명에 따라 코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닌 재밌는 퍼포먼스를 선사하는 퍼포머들과 함께 재미나게 코스를 돌아보며 옥천구읍의 역사를 알아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지용제 골목투어코스

1. 정지용 모교 죽향초 구교사
 옥천 최초의 공립학교 건물이자 등록문화재 57호인 죽향초등학교 구 교사는 1936년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당시 학교 건물은 주로 목구조로 건축하다 1920년대부터 조적식 구조(돌·벽돌·콘크리트블록을 쌓아 벽을 만드는 구조), 철근콘크리트 등의 방식이 도입됐는데, 지역 소규모 학교는 1940년대까지 목구조로 건축됐다. 이에 해당하는 죽향초 구 교사는 우리나라 근대기의 학교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2. 정구영 생거지
정구영 선생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창당준비위원장으로 뽑힌다. 사실상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창당된 당이었지만 “그 안에서 정구영 선생은 절대 권력에 쓴 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민주공화당이 방향을 잃지 않도록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고 함께 민주공화당을 떠났던 예춘호 전 의원이 증언한다.(2015년 11월 27일자 옥천신문) 이후 정구영 선생은 민주공화당 초대 총재로 추대되지만,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민주공화당이 3선 개헌을 단행하고, 3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체제 장기집권에 들어가자 탈당성명을 발표하고 1974년 1월 민주공화당을 떠난다. 정구영 선생은 3선 개헌을 두고 ‘우리가 만든 헌법을 우리가 짓밟는 짓’이라 평했다.

 


3. 김규흥 생가
나라가 위태롭던 당시, 김규흥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을 펼친다. 김규흥 선생은 앞서 보았던 죽향초등학교의 시초가 되는 창명학교를 1905년 세우는데, 이는 인재 양성을 위한 옥천 대표 근대 교육기관으로 평가된다.​
이후 중국 광저우로 망명한 김규흥 선생은 중국 혁명세력과 교류하면서 나라 독립을 준비한다. 특히 김규흥 선생은 중화민국을 탄생시킨 중국의 신해혁명에 직접 참여해 중요한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4. 정지용 생가, 문학관
정지용 시인은 옥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옥천을 떠난다. 당시 옥천에 났던 큰 홍수로 집과 재산이 모두 떠내려간 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다 서울 공립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 이후 휘문고보를 졸업한 이듬해인 1923년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고, 이때 유학생 잡지인 <학조> 창간호에 ‘카페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한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한 뒤에는 해방이 될때까지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로 부임한다.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한국어와 라틴어 강의를 하고,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한다. 이 외에도 정지용 시인은 <시문학>발간(1930),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1941) 등을 출간하며 꾸준히 활발한 문학 활동을 이어갔지만 1950년 6.25 한국전쟁 이후 돌연 행적을 감춘다. 월북 중 미국의 폭격을 맞았다, 납북 됐다는 등 여러 소문이 돌았지만 끝내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5. 옥주사마소
옥주사마소는 조선 중기 이후 지방의 고을마다 소과(小科)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가 모여 친목과 학문, 정치, 지방 행정 자문 등을 논하던 곳이다. 옥주사마소는 옥천 옛 지명인 옥주를 따 이름 지었으며, 어려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비축 저장해 두던 의창 건물을 뜯어서 1654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점차 압력 단체로 발전하여 폐단이 커졌으므로 1603년(선조 36년) 사마소를 없앤다. 조선 조정에서는 사마소를 없앴으나 옥주사마소는 살아남아 지금까지 맹맥을 잇고 있다. 옥주사마소는 경주사마소, 괴산 청안사마소와 함께 전국에 남아 있는 단 세 곳의 사마소 가운데 하나로,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희귀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로 보호되고 있다.

 


6. 옥천향교
지역 중심에 주요 기관이 있듯 구읍에는 향교가 있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역 교육기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옥천향교(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는 1398년(조선 태조 7년) 지어져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다시 세웠다. 옥천향교는 현재 유교성현을 기리는 석전제가 아니면 향교를 개방하지 않는다. 향교 구조는 앞으로 유교 교육을 위한 명륜당과 학생 거처인 동재와 서재, 중간에는 내삼문을 두고, 뒤편에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어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이 실시되자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문묘 제사만 남았다.

 


7. 육영수 생가(삼정승고가)
1600년부터 삼정승(김(金)정승, 송(宋)정승, 민(閔)정승)이 살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 아버지 육종관 씨가 1917년 매입한 고가는 예로부터 ‘양반마을’이라 불렸던 구읍의 흔적 중 하나다. 약간 언덕진 곳에 지어져 배수가 잘 되고, 정남향으로 해가 잘 들며, 앞으로는 산이 펼쳐져 손에 꼽는 명당인 고가에서 양반마을 구읍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삼정승 고가는 전형적인 양반가옥 형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천정희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삼정승 고가의 ‘솟을대문’은 말이나 가마를 타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데, 조선시대 정3품 이상이 가졌던 규모다. 대문을 지나 보이는 연못 앞 ‘연당사랑’은 풍류를 즐기기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역시 벼슬 했던 집에만 있는 부유함의 상징이다. 또 삼정승 고가는 같은 집임에도 안채, 위채, 아래채, 사랑채가 각각 독립돼 살 수 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청마루 밑에 공간을 둬 썩지 않게 하는 것, 여름에는 문을 걸쇠에 걸어 바람이 잘 통하도록 했던 것 등 옛 한옥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뒤 관리되지 않던 고가는 1999년 자손에 의해 철거된다. 이후 옥천군에 기증하여 지표조사와 고증을 통해 2004년 복원을 시작하고, 2010년 완공된다.

 

​출처 : 옥천문화원 공식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