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무후사(武侯祠)
제갈량의 무후사(武侯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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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0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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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종국

 

무후사는 삼국지 중 촉나라 유비와 관우와 장비 그리고 제갈량을 되새기며 관람하면 좋지 싶다. 그 중에도 유비와 제갈량을 모신 사당으로 1,800년여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그 때 그 모습을 담담한 마음으로 은근슬쩍 엿볼 수 있지 싶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주군과 신하(유비와 제갈량)가 함께 모셔진 도교 사당인 것이다. 이곳은 원래 서기 223년에 사망한 유비의 묘로, 정문에는 유비의 시호인 한소열제(漢昭烈帝)에서 따서 한소열묘(漢昭烈廟)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그러나 보통은 한소열묘라고 하기보다는 무후사(武侯祠)라고 부른다. 무후(武侯)는 제갈량의 시호로 그를 모신 사당이란 뜻으로 주군인 유비를 제치고 신하였던 제갈량의 인기가 그만큼 더 많음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무후사의 정문

  무후사(武侯祠)의 정문인 한소열묘(漢昭烈廟)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명비(明碑)가 있으며 왼쪽에 당비(삼절비)가 있고 정면에 이문(二門)이 있다. 지금의 무후사는 청나라 강희제 때(1672년) 중건된 것이다. 정문에서부터 삼절비-이문-유비전-과청-제갈량전–혜릉(유비릉)-도원을 돌아볼 수 있다. 삼절비는 제갈량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으로 정식 명칭은 촉한승상제갈무후사당비(蜀漢丞相諸葛武侯祠堂碑)이다. 서기 809년 당나라 헌종 때 세운 이 비석은 제갈량의 공적을 배도가 문장을 짓고, 유공작이 글씨를 썼으며 공예가인 노건이 그 글을 새겼다. 모두 당대 최고의 명인으로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삼절비(三絶碑)라고도 한다. 


삼절비

  이문(二門) 즉 정문을 지나 두 번째 문을 통과하면 사당 정중앙에 황금으로 치장된 유비의 찬란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 편전에는 관우 부자와 주창(周仓)의 상이 있고, 서쪽 편전에는 장비와 그 아들, 손자의 상이 있다. 또한 양쪽으로 이어진 복도의 동쪽은 촉한의 문신들, 서쪽은 무장들의 상이 늘어서 있다.


유비

  무후사(武候祠) 현판은 중국의 저명한 극작가이자 사학자였던 궈모뤄(郭沫若)의 필체다. 과청에는 삼국지와 연관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제갈량의 출사표이다.
         
무후사                                                 부채를 든 제갈량

  출사표는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이 오나라와 손잡고 위나라 정벌을 결심한 제갈량이 출전할 때 유비의 뒤를 이은 촉한의 2대 황제 유선에게 바친 글로서 이 글을 읽고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할 만큼 천고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회랑에 새겨진 글도 처음에는 정자로 썼으나 나중에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흘겨 썼다. 당초에는 글의 끝머리에 악비라고 씌어져 있어 송나라 때 악비(岳飛) 장군의 친필로 전해왔으나 근래에 이곳에 전시된 출사표의 초서 필체는 명나라 때 청두의 문인 백린(白麟)이 쓴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백린이 술에 취해 글을 쓰다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악비의 이름을 적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술 때문에 자신의 명작을 타인의 것으로 전해오다가 가까스로 이름을 되찾은 셈이다.


과청(过厅)의 출사표

  제갈량전 정전 중앙에 제갈량과 좌우측에 그 아들, 손자의 상이 모셔져 있다. 제갈량의 상 앞에는 그가 남방을 정벌할 때 사용했던 3개의 구리 북이 놓여 있다. 제갈고(諸葛鼓)라고 불리는 이 북은 원래 남방 소수민족의 악기였다.


제갈량전의 제갈고

  제갈량전 서쪽 붉은 담벼락 위로 대나무가 무성하다. 유비묘로 유비와 그의 두 부인이 합장되었다. 12m 높이에 둘레가 180m나 되며 무덤 위는 무성하게 나무가 들어서있는 작은 동산으로 산책하듯 한 바퀴 빙 돌아볼 수 있는 혜릉이다. 이곳은 습기가 많아 땅을 파지 못하고 바닥에 흙을 덮어 봉분을 크게 만들었는데 도굴범도 이곳만은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그 만큼 유비를 숭배하여 지금껏 유물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으로 예측하면서 발굴을 하지 않는 것은 아직은 복원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유비묘

  무후사 맨 뒤편으로 복숭아나무 등을 심어 작은 동산을 꾸며놓았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의 결의’를 한 곳이다.『비록 성은 다르오나 이미 의를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마음과 힘을 합쳐 곤란한 사람들을 도와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하고 한 해 한 달 한 날에 태어나지 못했어도 한 해 한 달 한 날에 죽기를 원하니, 하늘과 땅의 신령께서는 굽어 살펴 의리를 저버리고 은혜를 잊는 자가 있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죽이소서.』라고 복숭아나무 동산에서 제문을 올린 데서 ‘도원의 결의’라고 한다.


유비, 관우, 장비의『도원의 결의』

  이렇게 만여 평에 달하는 무후사 경내를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그동안 책에서 읽으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로만 머물렀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치 현장을 보는 것 같이 생동감을 더하면서 감동을 넘어 엄숙해지기도 한다. 저 멀리 아득하게 흘러간 역사 속에서 그들을 직접 만나보기도 하고 추억처럼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곧 삼국 중에 촉나라의 주역들이었고 이곳 쓰촨성 청두일대가 바로 도읍지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사람도 나라도 오간 데 없지만 그들의 발자취와 명성과 유물이 지금껏 전해오고 남아서 훌륭한 관광자원이고 관광지로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후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고 있음에 복을 듬뿍 받은 자랑스러운 조상이고 지역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사진 무후사의 정문
사진 무후사의 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