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누리와 덤, 번째와 째 번
에누리와 덤, 번째와 째 번
  • 도움뉴스 기자
  • 승인 2019.09.02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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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태호 중부대학교 교수
사진 최태호 중부대학교 교수
사진 최태호 중부대학교 교수

 

예전에 장날이면 여기저기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장터에 가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냐?”는 말이다. 그러면서 물건 값을 흥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장날 하굣길의 재미였다. 내용상으로 볼 때 물건을 살 때 깎아주는 일을 일컫는 것처럼 들린다. “세상에 깎아 주지 않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필자도 어린 시절에 그렇게 생각하고 자라왔다. 그러나 ‘에누리’라는 단어의 뜻은 ‘물건을 팔 때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부르는 것’을 뜻한다. 고객이 깎을 줄 미리 알고 그 만큼 가격을 보태서 말하는 것이 ‘에누리’다. 그것이 변해서 요즘은 ‘물건 값을 깎는 일’이나 ‘어떤 말을 더 보태거나 축소시켜 이야기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다음사전) ‘에누리’의 옛말은 ‘에히다(어히다)’에서 비롯되었다. ‘어히다’는 ‘베어내다(割), 잘라내다’의 뜻이다. ‘어히다>어이다’로 변했다가 다시 ‘에다>에이다’로 변했다. ‘에+ 누리(덩어리) = 에누리(잘라낼 것을 알고 미리 떼어낸 덩어리?)’로 완성된 형태로 본다. 그러니까 고객이 잘라낼 것을 미리 알고 덧붙여 부르는 가격을 말한다. 가격을 덧붙인 줄 알고 있으니 조금만 깎아달라고 흥정하는 중에 나오는 말이 ‘에누리 없는 장사 없다’로 정착한 것이다. 요즘은 “깎아주세요, 할인해주세요.”라고 하고 있으니 ‘에누리’라는 말도 추억 속의 단어가 되고 있다.

 반면에 흥정하고 나서 손님이 ‘덤’을 달라고 한다. 덤으로 주는 것이 있어야 흥정의 맛이 나고 사람 사는 정을 느낄 수 있다. ‘덤’이라는 것은 ‘물건을 팔고 살 때 제 값어치 외에 다른 물건을 조금 더 얹어 주는 것’을 말한다. 바둑을 둘 때도 집을 계산할 때 백(白)을 잡은 사람에게 더해 주는 규칙이 있다. 이것을 ‘덤’이라고 한다. 바둑은 먼저 두는 사람이 유리하기 때문에 나중에 두는 사람에게 그 불리함을 보상해 주는 규칙이다. 자두나무를 사면 작은 묘목을 하나 더 주는 것이 ‘덤’이다. 괘종시계를 사면 손목시계를 덤으로 주고, 트럭을 사면 승용차를 덤으로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므로 ‘에누리’와 ‘덤’은 반대의 개념이 들어 있다. ‘에누리’는 상인이 미리 덧붙이는 가격이고,‘덤’은 사고 나서 손님이 더 달라고 해서 제 값 외에 얹어가는 물건이다.  요즘은 정찰제가 시행되면서 시장에서 흥정하는 재미가 많이 사라졌지만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다. 시장에 가면 흥정하는 재미가 있어야 사람 사는 맛이 난다.

 

 다음으로 많이 틀리고 있는 것이 ‘번째’라는 단어다. 우리가 흔히 “에이브로햄 링컨은 미국의 열여섯 번째 대통령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16대 대통령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자. “나는 중국에 열여섯 번째 가는 중이야.”라고 하면 중국에 몇 번 간 것인가? 16회 째 가고 있는 중이다. 처음부터 시작해서 열여섯 번 중국에 갈 때 쓰는 말이다. 또 다른 용례를 보자. “그는 국회의원을 다섯 번째 하고 있어.”라고 하면 그 의미는 “그 사람은 5선의원이라.”는 말이 아닌가? 다섯 번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에이브로햄 링컨은 열여섯 번째 대통령이다.”라고 하면 1대부터 16대까지 링컨이 대통령을 했다는 뜻이 된다. 열여섯 번째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말이다. 아이고……

 

 그렇다면 뭐라고 표현해야 16대 대통령을 말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열여섯 째 번 대통령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평상시에 잘 쓰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시킬 때 주로 그 날짜에 해당하는 번호의 학생을 호명하는 경우가 제일 많고, 다음으로 앉은 좌석에서 몇 째 자리에 있는 학생을 호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저기 창가 쪽 앞에서 세 째 번에 앉은 학생 일어나 봐요.”라고 한다. 그러면 앞에서부터 세어 세 째 좌석에 앉은 학생이 일어난다. 이것이 답이다. ‘번째’는 처음부터 시작해서 주어진 숫자까지 모두를 말하는 것이고, ‘째 번’은 콕 찍어서 한 부분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우리말은 아무 생각 없이 말하면 다 맞는 것 같고, 또 주의 깊게 생각하면 다 틀리는 것 같다. 언어라는 것이 통하면 되겠지 하면 그만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 언어의 역할은 정보를 주고받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정보는 정확성을 생명으로 한다. 요즘 가짜뉴스가 많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민초들이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정확한 어휘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맑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