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을 되돌린 초등새내기
80년을 되돌린 초등새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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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29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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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종국

 

  전남 해남의 어느 농촌에서 88세인 할머니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신입생이 할머니를 포함해 4명이다. 다른 3명은 겨우 8세로 할머니와는 80년이 차이난다. 하지만 같은 1학년 새내기 동급생이다. 80년이나 늦은 것이다. 그래도 할머니는 넘치는 설렘에 학교생활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진짜 어린 시절은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끼니도 잇기 어려웠다. 결혼을 하였으나 크게 달라진 것 없고 자녀가 태어나면서 더 눈코 뜰 사이 없는 쉽지 않은 부모노릇이었다. 그 시절은 삶이 얼마나 어려웠던가. 더구나 여성이 남성을 앞질러 가기는 쉽지 않았다. 자녀가 60을 훌쩍 넘었다. 몸이 늙어 넉넉해진 살림에 마음의 여유는 생겼지만 여전히 공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눈치 챈 아들 내외가 거꾸로 학부형이고 보호자로 나섰다.

 

   문맹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단순한 체면문제가 아닌 현실문제였다. 그 때는 어쩔 수 없어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시집에서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외상값을 적을 수 없어 물건판매에 선뜻 나서지도 못했다. 어디를 혼자 가고 싶어도 글씨를 모르니 버스의 행선지를 알 수 없어 남의 눈치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다만 농촌에서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은 몸이라도 튼튼하니 평생을 논밭에 나가 일하는 것뿐이었다. 막상 자녀에게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할 뿐 도와줄 것이 없었다. 모른다고 할 수도 없어 바쁘다는 핑계를 댈 뿐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 때마다 찢어지는 가혹한 마음의 형벌로 공부를 하고 싶었다. 이제 그 기회가 온 것이다. 더는 망설일 것 없는 80년의 꿈을 이뤄보는 것이다.

 

   동급생은 8살이고 선생님은 40대이고 아들은 60대이며 할머니는 88세다. 세대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맞추며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니 학교생활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 성적은 아주 열심히 공부하여도 전교 4명 중 4등으로 꼴찌라고 하지 않는다. 그만한 노력과 자부심이 있는 것이다. 막내 손주 같은 동급생과 사이좋게 지내며 열심히 공부해서 중학교도 같이 가자고 한다. 참으로 넘치는 동심의 세계로 듣는 마음마저 가슴 뭉클하게 한다. 물론 6년 후면 할머니는 동급생과 입장이 다르다. 막연한 꿈이며 이상이라고 해도 괜찮다.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이 나에게도 뭔가 도전해 볼 수 있다는 간접적 메시지로 들리면서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지며 가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흔히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언제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악화될지 장담을 못한다. 이미 80년이 도도히 흘러간 뒤늦은 세월이다. 그래도 끝내 내려놓지 못한 공부며 그 시절 동심이 그리워 미처 누려보지 못했던 것을 찾아 나서는 셈이다. 이제는 더 이상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은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맛보는 참으로 특별한 봄날이기도 하다. 표현할 수 없는 흐뭇함이 저 밑바닥에서 뭉클하게 우러나온다. 그동안의 말 못한 아픔을 묵묵히 이겨내고 과감히 도전하는 모습에 새삼 경의를 표하며 그 무엇보다 아름답게만 여겨진다. 삭막한 겨울을 이겨내고 돋아나는 새싹이면서 곱고도 신비스런 꽃망울을 만들고 있지 싶다. 단순한 겉모습은 80년과 1년이란 세월의 차이이고 인간과 자연의 차이이지만 그 이상의 것으로 다가왔다.

 

   밑바닥 깊숙이 80년을 가두었다가 초등학교 새내기가 되었다. 자칫 마음만 더 아프게 할 수도 있지만 뚜렷한 목표에 의욕이 있다. 해낼 수 있을까 주변의 반신반의 눈초리에 고심도 많았겠지만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80년 차이인 88세 할머니는 병아리 손주들과 짝꿍이 되어 모처럼 두근두근 설렘을 안고 학교를 오가며 학업의 꿈을 펼치고 있다. 턱없이 늦어진 만큼 더 짜릿짜릿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 지난날의 안타까움을 훨훨 한꺼번에 털어내며 새로운 세상에 들어섰다 문맹을 벗어나며 세상이 새롭게 들어오는 것이다. 그동안 그 얼마나 답답한 삶을 살았는지 새삼 곁눈질로도 느낌이 왔었다. 박수를 보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봄이 온다는 소식 못지않게 참으로 기분 좋은 모습으로 남녘에서 포근하게 전해왔다.

   똑같은 일에도 때가 있다고 한다. 공부도 할 수 있을 때 배워야 하는데 그런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야속하기보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싫어서 안한 것이 아니라 그만한 여유가 주어지지 못했기에 더욱 서러운 것이다. 그래도 부모님을 탓하지 않고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꿋꿋하게 살아오다가 뒤늦게라도 배울 수 있으니 더 가슴이 벅차고 꿈만 같은 것이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며 늦어도 늦다고 생각지 않고 용기를 낸 것이다. 평생을 겪어온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무려 그 세월이 80년이나 걸린 것이다. 인생의 끝자락에 다다랐지만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배우겠다는 신념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아닌 당당하면서도 자랑스러움에 아름다움까지 깃들어 숙연해지는 것이다.

 

사진 김용복 극작가
사진 김용복 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