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어때] 보배로운 섬 진도
[여기어때] 보배로운 섬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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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16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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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종국

 진도로 1박2일 일정으로 33명이 함께 떠난다. 아직도 아침저녁은 날씨가 쌀쌀한 편이다. 봄이 언제쯤이나 오려나, 목을 길게 빼고 남녘을 바라보았는데 그새 알게 모르게 꽃이 피고 지며 4월 중순에 접어들었으니 달력을 들여다보면 벌써 봄이 절반은 가고 있는 셈이다. 시내는 이미 꽃이 많이 졌지만 오늘 남쪽으로 떠나도 가는 길목마다 꽃들이 기다리고 있어 꽃길을 함께 갈 것으로 기대해 본다.

진도는 보배 진(珍), 섬 도(島)에서 보듯 보배로운 섬으로 얼마만큼이나 보배로운지 살짝 엿보기로 한다.   

인도네시아는 섬이 15,000개로 세계에서 가장 많고, 두 번째는 필리핀이 7,100개이며, 세 번째는 6,800개의 일본이다. 우리나라는 3,500개로 네 번째로 많은 나라이다. 그러나 유인도는 480여 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무인도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은 덴마크령 그린란드이고, 남태평양의 뉴기니는 2번째이고 보르네오가 세 번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제주도는 세계에서 200등에도 들지 못한다. 두 번째가 거제도이고 진도가 3번째로 3,500개 중 3등이라니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큰 섬이다.  

진도는 목포에서 대불공단 해남의 화원반도를 거쳐 가는데 불과 500여 미터도 안 되는 좁은 해협으로 우리나라에서 조류의 흐름이 가장 빨라 물살이 회오리치는 곳으로. 평소에도 와랑와랑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고 울돌목이고 명량이라 할 만큼 여느 바다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이충무공이 비록 군대나 장비는 왜군에 열세지만 자연적 지형을 이용한 전술과 구국의 정신에서 한 수 앞섰던 것이다. 이를 모르고 왜군은 얕잡아보며 성급하게 불나비처럼 달려들었다가 화를 자초한 것이다.   

섬나라 일본이 임진년에 대륙에 대한 야망으로 침략하였으나 소강상태에 머물다가 5년 후인 정유년에 다시 침략하여 서남해로 기세당당하게 진격하였다. 원균이 맞서 싸우다 대패하여 겨우 12척의 배가 남은 것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습하여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고, 살고자 하면 도리어 죽을 것이다.”는 정신으로 왜선 133척을 무찌르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우리는 이충무공의 4대 대첩 중에 하나인 명량해전이라고 부르며 세계 해전사에 그 유례가 없는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제는 험한 물결이 몰아치는 바닷길이 아닌 연륙교인 사장교를 편안하게 자동차로 건너면 진도다.『진도(珍島)』하면, 아무래도 맨 먼저 진돗개가 떠오른다. 함경남도 지금은 양강도 풍산의 풍산개와 우수성이 비견되며, ‘경주개 동경이’와, ‘경산의 삽살개’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또한 강원도 정선과 경상도 밀양 등과 같이 수많은 민요 중에 진도아리랑이 떠오른다. 진도아리랑은 서리서리 절절하게 맺힌 한을 거침없이 씻어 내리는 소리로 구슬프면서도 시원하게 풀어낸다.   

고려 말에 조정이 힘을 잃고 무신정권이 들어섰다. 최충헌에서 아들 최우에게 넘어가면서 세상은 뒤숭숭하여 도둑이 들끓자 야경을 돌던 야별초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으며, 몽고군에 인질로 잡혔다가 도망쳐나온 사람들로 편성된 신의군을 합쳐 3별초라고 하였다. 왕실이 몽고에 굴복하자 항몽운동에 앞장을 섰다. 강화도를 근거지로 삼았다가 진도로 옮겨 용장산성과 남도석성 등을 쌓고 저항하였으나 여몽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지도자 배중손이 전사하고 탐라로 옮겨갔으나 최후를 맞았다.  

진도는 서화예술이 발달한 곳이다. 조선후기에 진도출신 ‘소치 허련’은 충청도 예산 출신으로 당대에 최고였던 ‘추사 김정희’에게 서화수업을 받으면서 남종화의 대가로 성장했다. 말년에 고향으로 내려와 집을 짓고 당호를 ‘운림산방’이라고 하였다. 이는 첨찰산을 지붕으로 삼고 사방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다고 붙인 이름이다.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으로 부족해 5대로 이어지며 한국 남종화의 성지가 되었다.   

진도의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에서 조수간만의 차이로 수심이 낮아질 때 길이 2.8㎞, 폭 10∼40m의 바닷길이 해마다 서너 차례 드러난다. 이런 괴이한 현상을 1975년에 주한 프랑스 대사인 ‘피에르 랑디’가 진돗개에 관심이 많아 진도에 들렀다고 목격하고 본국에 보고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었다. ‘신비의 바닷길’이라고도 하는데 2000년 3월 14일에 명승 제9호로 지정되었다. 여기에다 뽕할머니의 전설까지 전해지면서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고 있다.  

바다에는 해산물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하여 농작물이 넉넉하다. 사람 사는 세상 애환을 달래고 돋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술을 찾게 된다. 이에 진도 지방 특유의 홍주가 빚어지고 그 비법이 전해져 왔다. 보리에서 지금은 쌀로 만들어지는 막걸리에 지초(芝草)를 증류과정에서 가미하여 40도가 넘는 백주를 홍주를 탈바꿈한 것으로 400년 애주가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하지만 주민이 한 때 12만 명에 이르렀으나 채 3만도 안 되는 것을 보면 농촌은 농촌이고 어촌은 어촌으로 잡아둘 수 없나 보다.    

2014년 4월 16일 안산의 단원고 학생에 일반인까지 476명이 인천항에서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로 가다가 이곳 진도의 부속 섬인 조도 인근에서 침몰되어 304명의 희생자가 생겨났다. 5년이 지났어도 그 원인을 속 시원하게 밝히지 못하여 가슴 아프게 한다. 그래서 애를 끊고 국민적 분노를 자아내게 하며 추모객이 몰려들었던 팽목항(진도항)이 있는 곳이다. 저 앞바다는 아무렇지 않게 출렁거린다. 참으로 무심하고 한산하여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모두를 한순간에 삼키고 모른 척 하니 섬뜩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보릿고개에는 하루가 그렇게 길다고만 하였는데 오늘의 하루는 너무도 짧게 지나가는구나. 대전에서는 이미 끝물인 줄 알았던 벚꽃이 며칠 늦춘 듯 한참 폭죽을 터트리며 환영일색이다. 벚꽃이 어쩌면 이리 발길 닿는 곳마다 늘어서 조용히 손을 흔들고 그로도 부족하여 산자락마다 반반은 됨직하게 수를 놓아 봄을 밝히고 진도를 밝히고 나그네 마음을 밝히고 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준비를 하였는지 감탄을 자아내며 이제 벚꽃하면 이곳 진도를 떠올려도 손색없을 듯싶다.    

삼별초의 용장산성이며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에서 숙연해지고 신비의 바닷길까지 어우러진 자연에 3대를 넘어 5대로 가고 있는 그림 같은 운림산방의 그림이며, 장전미술관은 서예의 산실이었으며 아리랑으로 예술의 혼이 타오르고 있다. 어찌 그뿐 이드냐, 맛깔스런 음식에 술 몇 잔이면 홍주보다 더 붉게 마음 타들고 붉어지니 아니 좋던가. 한도 많고 흥도 많다만 씻김굿에 묵은 때를 훌훌 털어내고 내려놓아 가벼워진 마음으로 일어선다. 한 번으로 부족하면 주말마다 열리는 민요 한마당이다.  

개들도 지능이 있어 반복해 가르치고 훈련하면 저처럼 묘기를 부리는구나. 아무려면 사람이 개만도 못하겠는가. 뭉클뭉클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으랴. 여기에 흥을 더 돋우는 것은 진돗개의 400미터 내달리기 경주다. 1,2,3,4,5번 다섯 마리가 선수로 나섰다. 푸짐한 상품도 걸렸다. 오늘은 4번이다. 달려라, 힘껏 내달려라. 목청껏 내질러 본다. 몸만 아닌 마음도 뛰고 상품이 뛴다. 하늘이 뛰고 바다가 뛰고 진도가 뛰고 네가 뛰고 내가 뛰고 오늘 하루가 뛴다. 스트레스가 멀리멀리 달아나버렸다.   

이처럼 진도는 예로부터 삼별초의 목적이 어떠했든 몽고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맞아 이충무공을 비롯해 왜군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는 등 나라사랑 구국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런가 하면 가정에서, 사회에서, 나라까지 덕지덕지 들어붙었던 크고 작은 수없는 한(恨)의 응어리를 진도아리랑이며 씻김굿 한마당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림이며 서예에 민요까지 예술이 생활화된 곳으로 그 어느 고을보다 못잖은 보배로운 섬이라고 하여도 손색이 없지 싶다.

- 2019. 04. 13. ~ 04. 14. 문학사랑 진도 문학기행에서      

 

사진 김용복 극작가
사진 김용복 극작가